왜 내담자는 같은 상처로 돌아갈까?

제17화

by 그래도

1. 상담을 하다 보면, 내담자가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때가 있습니다.

“또 그 얘기인가…” 하는 생각이 스칠 만큼, 비슷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겉으로는 돌고 도는 것 같지만, 그 반복 안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익숙한 상처는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안전한 자리가 되곤 합니다.


2. 상처는 단순한 ‘아픈 기억’이 아니라, 나를 설명해 온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아픔은 나를 무너뜨리면서도 동시에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내려놓는 일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새로 쓰는 일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익숙한 상처로 돌아가는 이유는, 그것을 잃으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늘 무시당하며 자란 사람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이상하게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익숙한 상처는 여전히 아프지만, 동시에 가장 예측 가능한 세계입니다.

새로운 길은 낯설고 불확실하지만, 상처는 오래 살아온 자리이기에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3. 또 같은 상처로 돌아가는 건, 아직 끝내 애도되지 못한 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 상처 안에는 떠나보내지 못한 관계, 끝내하지 못한 말, 닫히지 않은 문이 남아 있습니다.

내담자가 반복해서 그 장면을 찾아가는 건 미련이 아니라, 작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정신분석은 이것을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 불렀습니다.

어린 시절 학대를 경험한 이가 성인이 되어 학대하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이번엔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을까”를 시험하는 몸부림일 수 있습니다.


4. 그러나 반복은 단순한 정체가 아닙니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같은 상처로 돌아올 때마다, 이전과 다른 장면을 만들어 줍니다.

예전에는 무시당했던 감정이 이번에는 존중받고, 예전에는 버려졌던 마음이 이번에는 안전하게 머무릅니다.

이 차이는 미세하지만, 반복을 새로운 경험으로 바꾸는 힘이 됩니다.

같은 상처라도, 이번에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담자는 경험합니다.


5.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담자도 무력감이나 조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되풀이되면, 상담자는 ‘왜 또 이 얘기일까?’ 하는 허무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상담자의 인내와 성찰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조급히 해석하거나 해결하려 하면, 그 반복은 다시 옛 장면으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용히 곁에 머무르고 견뎌주는 태도가, 반복의 흐름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되곤 합니다.


6. 그래서 상담에서의 반복은 ‘낡은 길로 되돌아감’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다시 쓰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내담자가 같은 상처를 다시 꺼내 올 때, 그것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익숙한 상처를 다시 꺼내는 순간, 내담자는 비로소 익숙하지 않은 미래를 향한 작은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전 16화왜 상담자는 내담자의 ‘감정’이 오래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