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삶을 담아낼 정치를 찾아서
*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 (J.D. 밴스,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레드넥, 화이트 트래시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가난한 백인 계층 ‘힐빌리’의 삶을 보여주는 <힐빌리의 노래>는 한때는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러스트벨트를 무대로 한다. 이곳의 백인들은 팍팍하고 가난하며 정서는 메말라가고 있다. 푸석푸석한 삶에서 이들의 지상 과제는 생존이지만 이들도 신을 믿고, 가족을 부양하려 애쓰며, 미래를 그린다. 저자 J.D. 밴스도 그들 가운데 나고 자랐다. 그는 때로는 강인한 의지로, 때로는 우연한 기회를 움켜쥐어, 하지만 결국엔 주변인들의 사랑으로 살아내어 예일대를 거쳐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며 자수성가했다. 그가 돌아본 러스트 벨트의 이야기가 <힐빌리의 노래>다. 원제는 그냥 '노래'가 아니라 ‘슬픈 노래’를 뜻하는 elegy다.
이 책은 강퍅한 삶을 살아낸 한 인간의 이야기로서도 읽을 만 하지만(영화화됐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그들의 삶을 둘러싼 정치 사회경제적 현실이 그들을 부지불식간에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을 듯하다. 가난한 백인이 자신도 구제되길 바라면서도, 복지급여의 혜택을 받는 다른 소수자를 혐오하는 이중의 감정. 그리고 그런 감정을 부추기며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 그 안에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그의 할머니의 경우를 보자.
할모는 식료품 잡화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큰 소리로 불평했다. “저런 저 빈대 같은 놈들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술 처마시고 휴대전화도 쓰는데, 왜 평생을 일한 사람들이 근근이 먹고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이런 것들은 지나치게 동정심이 많은 우리 할모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의견이었다. 어느 날은 정부가 해도 너무 하게 퍼준다고 맹비난을 했다가, 다음번엔 정부가 국민을 지독하게 안 도와준다며 혹평을 늘어놨다. 결국 정부는 그저 빈곤한 사람들에게 지낼 곳을 마련해준다는 취지였고, 할모는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철학적 신념에서 ‘제8조 프로그램’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할모의 내면에 숨어 있던 민주당 지지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할모는 일자리 부족 문제를 소리 높여 비난하면서, 우리 동네에 건실한 청년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도 동네에 일자리가 없어져서인지 궁금해했다. 동정심이 더욱 깊어지는 순간이면 할모는 미국에 항공모함을 건조할 돈은 있으면서 엄마 같은 사람 누구나 약물 중독 치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돈은 없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이름 모를 부자들을 비난할 때도 있었다. 욕을 먹는 부자들은 할모가 보기에 눈곱만큼의 사회적 부담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할모는 주민 투표에 부쳐진 교육 세금 징수가 번번이 부결되자, 이런 동네에서 나 같은 학생들이 질 높은 교육을 받기는 글렀다며 혀를 찼다.
할모의 정치 스펙트럼은 양극을 넘나들었다.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급진적 보수주의자가 되기도 했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할모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할모가 정책이나 정치에 관해서 입을 뗐다 하면 난 귀를 닫아버렸다.
p.236~237
복지 수당을 받아 생존하는 사람들과 그러한 정책을 유지하는 정부를 향해 ‘퍼주기’라고 비판을 하다가도, 부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국방비 등 시민의 실생활과 거리가 먼 지출이 이어지면 혀를 끌끌 차는 극단을 오가는 반응. 정치적 무지렁이 같아 보이는 이런 반응을 두고 저자는 “그러나 머지않아 할모의 모순된 견해에 굉장한 지혜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p.237)고 고백한다. 척박한 삶을 이 악물고 버티지만, 삶이 더 나아질 기회란 점점 줄어든다. 교육 수준이 높아질 기회를 갖게 된 사람은 떠난다. 그 공간은 더욱 황폐화된다. 취지는 훌륭했을지언정, 그 지역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을 배제한 정책들이 힐빌리들의 정치의 스펙트럼을 끝에서 끝까지 요동치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지원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택 지원 자체는 의미가 있지만 지역사회에선 이렇게 울타리는 치는 식의 주거 정책이 오히려 배제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는 실제 임대아파트 정책이 직면한 비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다른 책이 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의 책 <위험한 정치인: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 의학자의 보고서(Why some politicians are more dangerous than others)>(이희재 옮김, 교양인)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00년부터 2007년까지 통계를 분석한 결과, 제목에서 나타난 대로, 특정 정당이 집권하면 자살과 살인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화당 출신 대통령 집권기에는 폭력치사 발생률이 증가하고,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통계가 얼마나 유의미한지, 혹은 이를 얼마나 유의미하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지만 (통계 자체에도 몇 번의 예외도 있지만) 어떤 정권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자살과 살인이 급격히 증가했다가, 급격히 하락하는 것 자체가 특이할 점이며, 따라서 통계와 집권 정당과 유의미한 관계가 있다고 이 학자는 설명한다. 그리고 그 배경엔 실업 등의 경제 불평등과 그로 인한 수치심이 자리한다고 분석한다. 불평등을 조장하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정당 정책이 폭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의학의 관점을 가져오며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위해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에 우리는 자살, 살인이라는 전염병을 막고 다스리려면 그런 전염병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불평등, 치욕, 절망이라는 병인을 줄여서 청결한 정치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런 위험 요인에 이미 노출된 사람을 치료하거나 처벌하는 데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통계 수치에 담긴 마지막 함의는 상이한 정당들과 그 정당들이 내놓는 상이한 사회경제 정책과 성과를 평가하는 토대를 이 통계 수치가 제공한다는 것이다.
p.222~223
그리고 19세기 의사인 루돌프 피르호의 발언으로 책을 끝맺는다.
젊은 시절 피르호는 1848년 혁명 세력의 일원으로 싸웠고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비스마르크에 맞서 다년간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가슴을 울리는 피르호의 대범한 발언을 인용하면서 이 책을 끝맺을까 한다.
"의학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사회적 여건의 개선은 이러한 결과를 더 신속하게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의사는 본디 가난한 사람의 변호인이고 사회 문제는 넓게 보면 의사의 영역에 들어간다. 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의학통계학은 우리의 측정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무게를 생명으로 달고 어디에 시신이 더 두텁게 쌓였는지를 볼 것이다. 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p.225~226
<위험한 정치인>은 양당제로 나뉜 미국 정치의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결과적으로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를 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며 <위험한 정치인>을 떠 올린 건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개인의 삶과 정치 경제가 결국은 하나의 끈으로 묶여 들어갈 수 있음을 두 책이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공감받지 못한 이들은 불평등, 치욕, 절망, 수치심에 빠지고 극단을 오가는 정치적 감정을 느낀다. (당장 우리 주변을 돌아봐도 독재 정권을 살아온 어르신들이 ‘그래도 그 시절에 경제는 많이 발전했다’ ‘덕분에 먹고살 수 있게 됐다’며 향수를 느끼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의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은 세뇌의 결과일까.) 이들을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증오에 기대 혐오를 조장하고 타인을 불신하고 적으로 규정해 공격하는 방식의 정치가 현실에 존재하기에, 그들이 정치인의 얕은수를 뛰어넘는 선택을 해주길 기대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의 끝은 결국 다시 정치의 근본을 향한다. 정치란 인간의 얼굴을 해야 하며,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함을, 승리를 위해 필요한 전략 이전에 바로 그게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자서전의 주인공과 닮은 점이 거의 없어도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먼지 같이 흔하면서도, 숭고한 일임을 깨닫는다. 정치가 그런 일상을 압도하지 않고,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