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는 오랫동안 깨어 있었다. 침대 옆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켰다. 몸을 돌려 빈자리를 보았다. 그 자리가 내뿜는 공허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가 싸움을 끝으로 집을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서로를 질책하며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았지만, 그는 언제나 집안에 머물렀다. 침대 구석에 드러누워 묵묵히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이번에는 달랐다.
그날 저녁, 정희는 극도로 지쳐 있었다. 하루 종일 끝없이 이어지는 회의, 사방에서 쏟아지는 업무들. 손끝마저 저릿하게 예민해졌다. 집에 돌아가도 그가 저녁을 준비해 놓았을 리는 없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깊은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텅 빈 거실, 깜빡거리는 텔레비전 불빛만이 어둠을 깨고 있었다. 소파에 기대어 드러누운 그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의 무게를 모른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 가슴 한편에서 차가운 불쾌감이 조용히 꿈틀댔다.
"오늘 어땠어?" 정희의 목소리는 공기 중에 흩어졌다. 돌아온 건 무심한 대답.
"뭐, 별거 없었어."
그의 대답은 거리감을 숨기지 않으려는 시도 같았다. 무심한 표정과 그가 겪고 있을 피로의 정도는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을 주었다. 한때 기대했던 그의 변화된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와의 거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가고 있었다. 정희는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들이쉬며, 무언가가 어긋났음을, 그리고 그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정희는 다시 물었다. "밥은 먹었어?" 하루의 피로를 잠시 밀어두고, 늘 그래왔듯 오늘도 스스로 저녁을 준비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녀의 기대를 베었다. "어, 아까 돈까스 시켜 먹었어." 그 말로 그날 저녁, 정희의 자리를 미리 지운 티를 내고 말았다.
기가 막혔다. 가슴 애써 참고 간신히 누르고 있던 화가 천천히 떠올랐다. 온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려던 마음은 온기를 잃었다. 하루가 그의 말 한마디에 의해 날카롭게 변해 정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너무도 쉽게, 정희의 끔찍한 하루에 별을 달았다. 아직도 그의 삶에서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는 듯한 의구심. 돈까스 한 끼가 그녀가 애써 생각해낸 저녁의 의미를 삼켜버린 것이었다.
"밥을 먹었어? 혼자서? 돈까스를?" 정희의 목소리는 부서질 듯 흔들렸다. 그 질문 속에서,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차가운 외면이 분명했을 테니. "내가 올 줄 알았잖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하루를 보냈는지 알기나 해? 같이 저녁을 먹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정희의 목소리는 공기 속에서 흩어져 가는 먼지처럼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알지, 힘들겠지." 그는 단순하고 무심했다.
그의 진심 없는 말투로, 그가 정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냈다. 모욕감이 밀려왔다. "너는 왜 항상 네 것만 챙기고 나를 외면해? 중요한 일은 언제나 뒤로 미루고, 결국엔 내가 다 떠안게 돼. 나도 쉬고 싶어. 그냥 잠깐이라도, 밥 한 끼 하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정희의 목소리에는 피로로 쌓인 스트레스와 함께 그에게 서운함이 덧붙여져 감정의 농도가 짙어졌다.
그가 홀로 돈까스를 먹으면서 느꼈을 기름진 맛을 다시 음미하는 악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오래된 기름에 튀겨진 돈까스의 맛이 입안에 남아 맴도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느끼하고 불쾌했다. ‘돈까스…’ 정희는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는 식탁에 놓인 반듯하게 자리한 빈 의자에 어떤 감흥도 없었음이 분명했다.
여전히 그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람하고 말을 할 땐 사람을 보라고.” 정희의 말에 그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닿았다. 흘낏 던져진 그 눈빛은 정희를 놀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공허한 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자신의 분노조차도 하찮게 여겨져야 하는 것처럼. 그는 여전히 차분했다.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어? 그냥 내 방식대로 한 거야. 왜 그렇게 화를 내? 배가 고팠고, 넌 연락도 없었잖아. 매일 먹는 저녁이니까, 그저 시켜 먹었을 뿐이야. 너를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
침착한 그가 얄미웠다. “너는 언제나 네 방식대로만 하고, 그 속에서 나는 없어.” 말이 나오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정희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더는 그에게 무엇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저녁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느끼는 고립감, 그와의 관계 속에서 스며드는 소외감이 문제였다. 그저 밥을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니라, 함께하는 저녁을 통해,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둘 사이의 간격이 조금이라도 메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랬듯, 배고픔을 채우는 일처럼 모든 걸 간단히 처리했다. 그녀라는 존재를 그저 배를 채워줄 무언가처럼.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희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떠밀려가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정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가 그녀를 몰아붙였다. "네 방식이 문제야! 넌 언제나 너만 생각해. 내가 네 하녀야?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데?" 목소리는 떨렸지만,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했다. 그도 마침내 무겁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피로와 짜증이 엿보였다. "이렇게 싸우면, 나도 더는 할 말 없어."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회피였다. 늘 그랬다.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늘 도망치는 그의 모습이 너무 익숙했다. 정희는 그가 다시금 벗어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면해야 할 무언가로부터, 혹은 그녀와 마주해야 할 그 순간으로부터 그는 끊임없이 도망쳤다.
그날 밤, 정희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방안에 가득 찼던 침묵이 깨졌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정희의 떨림과 분노가 뒤섞여, 감정을 단번에 드러내는 울림이었다. 무능함이 한낱 껍질처럼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그렇게 작아 보인 적은 없었다. 그의 방어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언제부턴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했다. 잠시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묻어나지 않은 텅 빈 얼굴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희에게 등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지독한 늪에 빠지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정희가 도무지 올라갈 수 없는 높은 벽. 그녀의 질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정희의 마음은 차갑게 내리친 물방울처럼 벽을 타고 미끄러지며 흘러내렸다. 메아리 없는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은 듯, 말들이 허공에 사라졌다. 그가 집에서 나갔다. 아무래도 그를 위한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정희는 그가 잠시 바람을 쐬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의 눈빛에 스쳤던 불편함, 피로를 알아차렸기에 잠깐의 거리가 필요하리라 여겼다. 정희도 그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둘 사이에 생긴 이 거리가 오히려 싸움을 피하는 방법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밤은 깊어지고, 창밖은 여전히 고요했다. 정희는 행여 그가 남긴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미 사라졌고, 점점 시간은 말없이 그녀를 짓눌렀다. 빈 공간은 정희를 흐려지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그와 함께 사라질 것 같은, 보이는 모든 게 싫은 듯 한 기묘한 감각이 몰려왔다.
시간이 흐르고, 새벽이 가까워졌다. 그의 발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는, 무언가가 끝나가는 것 같은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정희는 의식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걸 느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자신의 존재를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그저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며, 잊혀져가는 감정들을 떠올렸다. 시간을 세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했다.
정희는 자신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가 돌아와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 말 한마디면, 마음 속의 불편함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희는 알고 있었다. 그 한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 한구석에는 깊은 지겨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복되는 싸움이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에, 고단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돌아와 사과한다 해도, 다시 같은 이유로 다툴 것이 뻔했다. 그런 경험은 이미 충분히 겪어왔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기회에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가 바뀌든, 아니면 영원히 헤어지든.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왜 항상 자신이 더 참아야 하는 걸까? 그의 무관심과 변명 없는 침묵은 무딘 칼날처럼, 정희의 마음 깊숙이 긁어냈다. 쌓여만 가는 불만과 분노, 그리고 이해받지 못한 고통이 그녀를 짓눌렀다. 가끔은 그가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주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지만, 그런 기대는 날이 갈수록 더 멀어지는 듯했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마음속에서 서서히 번져오는 쓸쓸함은 그 무관심의 깊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고, 정희는 그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 한켠에서, 지나가는 바람처럼 아쉬움이 스쳤다.
사랑이 남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제 낡고 닳아, 속에서 솟아오르는 실망과 짜증을 덮지 못했다. 그와의 관계는 얇은 유리잔처럼, 깨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위태로움을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매 순간 부서질 것 같은 불안이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어딘가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발걸음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고, 밤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가 집을 나서던 그 순간, 모든 감정이 반복되었다. 앙상하게 남은 분노와 상처, 그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기어이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