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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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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27. 2024

(7)

정희는 오래전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어딘지 불분명 했다. 머릿속이 불안하게 어지럽혀져 있었고, 정리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해답을 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흐트러진 그녀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정희의 기억 속에서 그는 지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질 것 같으면 모호한 언어의 뒤로 숨어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의 속내를 알게되었다. 그의 말은 애매하게 꼬아져 있었고, 진의를 짐작하기 어렵게 했다. 개념을 다룰 때면 그의 이런 기술이 더욱 빛이 났다.

“퇴행도 진화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진화와 퇴행을 교묘하게 뒤섞으며, 자신의 말을 그럴듯한 전제로 깔아놓았다. 그의 의도를 따져 묻지 않는 한, 그 전제는 은근히 받아들여졌고, 그 안에서 그의 말은 왜곡되지 않았다. 그런 설계를 그는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을 생각을 자신만의 기발한 방식으로 펼쳐 보이며,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를 마치 독특한 해석인 양 내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유별나다면, 어쩌면 그 점에서 유별난 사람이었다.

“인간의 꼬리뼈 같은 거지. 이제 더는 필요하지 않아서, 어느새 흔적으로만 남아버렸어.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진화라고 부르지. 사라진 것들은 그저 쓸모를 다한 것들이고,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우리는 새로운 걸 만들어냈어. 비행기를 타고, 인터넷을 하고, 점점 더 빨라지고 멀어지고 있어. 결국에는 신처럼 되고 싶은 욕망, 시간을 지배하고 싶은 갈망에서 시작된 거지. 버리고, 다시 만들어내고, 그렇게 문명은 한 발씩 나아가는 거야.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러니 퇴행이라는 말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셈이야.”

그는 늘 그랬다. 간결하게 던진 문장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게 늘어놓았다. 말들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실속은 없었지만, 표면은 그럴듯하게 꾸며져 번들거렸다. 넘쳐나는 말 속에는 깊이를 찾기 어려운 공허함만이 가득 찼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는 좀처럼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바랐던 건 단지 누군가의 눈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의 말은 바람처럼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정희는 그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여 알아차렸다 해도, 그 말의 의미를 굳이 붙잡으려 애쓰진 않았다. 어딘가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듯 보였지만, 결국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되이 흩어지는 말들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 말들은 뒤엉켜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마음 깊은 곳에 걸려 있었다. 그는 정희에게 단지 사람들 앞에서 은근히 주목받는 걸 즐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만, 하필 그녀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머물렀다. 여전히 검붉고, 한때는 섹시하다고 느꼈던 그 입술. 설렜다. 사랑에 빠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서로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며 살아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변한 건 단 하나였다. 이제는 그 입술이 더 이상 그녀에게 섹시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의 검붉은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을 때, 문득 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의 감정인지, 아니면 그때의 감정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때는 좋았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당시의 감정 속에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정희는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집은 정리된 듯 깔끔했지만, 그 안에 남겨진 것은 더 이상 꺼내지 않은 말들과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집은 온통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그 긴장감이 그들을 위태롭게 흔들었다. 더 이상 침묵 속에 머물 수 없었다. 밀려오는 불안과 공허함은 그녀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했고, 무엇으로도 그녀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져 갔다.

“우리 헤어질까?” 하루, 정희가 불쑥 그렇게 말을 꺼냈다. 담담한 얼굴, 그 얼굴은 마치 아무 감정도 없다는 듯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녀의 말은 의식 속 깊은 곳에서, 차분하게 흘러나온 것 같았다. 실없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갑작스러웠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말에 대해 반응은 보였지만, 정희는 그 반응이 자신이 떠올린 말이 너무 갑작스럽고 불안하게 들렸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반응이 그랬으니까.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정희는 아무런 부담이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생각해 봤어.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여행 내내, 그는 의도적으로 세운 계획들을 흐트러뜨리고 싶었다. 때때로 그는 주도면밀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주 나중에야 꺼냈다. 미리 환경을 조성하며 준비하는 그 버릇. 사냥꾼에게는 유효한 습관이었지만, 연인으로서는 실패였다. 그가 절대로 고칠 수 없는 것이었다. 불편한 감정을 회복해보려는 노력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그를 몰아세웠다. 지금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떡밥을 뿌리고 낚시를 하려는 태도.

정희의 말은 고요한 호수의 물결을 빼앗았다. 그가 타고 있던 배는 흔들리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정희의 의도를 빠르게 읽어내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인데? 내가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거야?” 질문인지, 원망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말이 그냥 쏟아졌다. 그렇게 잘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저 정도라니, 그저 한심하고 기가 막혔다. 정희는 관계가 무너지는 이유가 반드시 누군가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함과 지겨움, 서로를 향한 조용한 감각. 과거에 사로잡혀 역동성을 잃어버리면, 관계는 그렇게 끝나버린다. 미래가 없는 삶은 결국 지속 가능하지 않다. 반드시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 했다. 그것도 생산적인 것들.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반복이라면 감정은 지속되지 않는다. 단절된 후에야 한참 나중에서야 비로소 다시 회상으로 추억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헤어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된다. 그만큼 그들의 시간은 정체되어 있었다. 그 것은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관계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해야 했던 것이다.

정희는 이미 그를 다루어 본적이 있었다. 그만큼 여유로웠다. “아니,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나를 지극히 사랑했어. 그래서 나는 평화로웠어. 그건 고마워. 하지만…” 정희는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 그와의 인연은 끊어내기 어려운 질긴 실타래와 같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엮여지는 것은 있어야 마땅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서로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힘을 주었다. 일상의 작은 기쁨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스치고 지나가야 하는데, 그들은 그 꽃잎들을 움켜잡으려 애쓰며 겨우 관계를 이어왔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버린 탓에, 정희도 그도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린 듯했다.

“그럼 왜? 왜 이혼을 이야기해? 도대체 무슨 이유야? 도대체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이제 와서 이별을 입에 올리는 이유가 뭐야?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어디 아파? 우울한 거야?” 그는 점점 더 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정희는 그런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분노도, 당혹감도. 그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문제는 지금 자신의 깊은 우울 감을 더 이상 누를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그의 모든 게 못마땅했다. 그를 괴롭히는 방법은 쉬웠다. 말이 아니라 분위기를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언제부터인가 당신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평하거나 불만을 늘어놓는 일뿐이야. 자주 고민했어. 나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런데 그 질문의 끝은 언제나 똑같았어.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으로 돌아왔지. 지금까지 당신만큼, 아니 그보다 더 노력했어. 그런데 이제는 그게 문제야. 왜 노력하는지 알 수 없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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