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또는 회색의 정장을 입은 남녀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모인 수도사들처럼 차분하고 단정했다. 발밑의 대리석 복도는 길게 늘어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은 그들의 실루엣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그 빛은 묘하게도 그들을 쉽게 이곳의 배경으로 만들었다. 위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무거운 기세를 풍겨내려는 듯했다.
복도에 울리는 둔탁한 발소리가 뚜벅, 뚜벅, 천천히,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멈추게 할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을 지닌 소리였다. 공기 속에서 잔잔한 떨림을 만들어낸, 그 순간 정희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시간마저도 정지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그곳에 서서 정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잊고 싶은 기억. 정희가 그의 시선을 잡아채려 할 때,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건조하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감정이 깎이고 다듬어진 끝에 남은 빈껍데기와도 같은. 그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분노와 혼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것 같았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쓸어 넘겼다. 단단하게 조여맨 파란 슈트는 그를 흠 없이 드러냈지만, 그 색은 정희의 눈에 더욱 차갑고 생생하게 각인되었다. 깊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처럼, 그는 정희의 마음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와 대척점에 어정쩡하게 앉아야 했던 정희는, 마치 세상의 끝자락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불안으로 두근대는 가슴 위에 붙은 하얀 종잇조각은 그들 사이의 불편한 거리감을 상징하듯 떨리고 있었다.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정희는 그 종잇조각에 자신을 담아내고자 했지만, 그 또한 더없이 허망한 일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정희는 '지긋지긋하네. 정말.'이라는 말을 흘렸다.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새어나온 탄식이었다. 그를 떨쳐버리려는 노력이기도 했고,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무거운 압박이 남긴 흔적이기도 했다. 언뜻 특별한 감정을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도 정희의 개인사정을 알지 못했으니. 하지만 정희는 과거의 그림자에 짓눌리고 있었다. 하필 지금 이 순간 그를 만나 자신을 잃어버린 듯, 그녀는 고립된 시공간 속에 갇혀 있는 한 조각이 되어있었다.
정희는 길고도 험난한 터널을 지나온 오래된 기차처럼, 견디고 버텨 쉬지 않고 달려왔다. 매 순간이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 위태로움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좌절과 혼란에서도 어떻게든 발을 내딛으며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탱했던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어느새 그 말은 정희의 일상에 녹아들어 삶을 억누르는 무언의 족쇄처럼 굴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상반된 욕망이 뒤엉켜 있었다. 하나는 지금의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고통과 함께 자신을 이루고 있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살고자 하는 자의 애처로운 몸부림. 고통의 끝을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 끝이 자신을 더 공허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까 봐 겁먹은 마음. 정희의 매일은 그 두 감정이 교차했다.
마지막이 아니어야만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건 다시금 고통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희는 자신의 괴로운 삶에서 희망의 잔여물이라도 찾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마치 구름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만 했다. 붙잡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 같은. 그녀의 하루는 그렇게 불안 속에서 무기력하게 허공에 떠다녔다.
미신이나 징크스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이번이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우스꽝스럽고 무력했다. 운이나 운명에 기대는 것 같아서. 그만큼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이었다. 정해진 결과가 있는 이라면 어떤 선택도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 이 순간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이 실패를 예견하는 암시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다른 시간과 장소에 또 다시 등장한다면 그것도 실패를 암시하는 상황인 것일까?
그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라도 밀어내야 했다. 아니면 자신이 여기에 서 있을 이유조차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마치 흔들리는 가설이 무너질까 두려워 억지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면접에 집중했다.
방 안에는 각자에게 배정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거대한 창문이 하얀 빛을 퍼뜨리며 정희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상태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조명은 의도적으로 어둡게 설정되어, 그들의 존재는 더욱 불확실해졌다. 알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하는 일은 정희의 피부에서 핏기를 모두 빼앗아갔다.
따뜻하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한을 느끼며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떨림은 마치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 되살아나는 감각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정희는 자신의 존재가 이 공간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저 무형의 그림자에 불과한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심장은 긴장으로 얼어붙은 듯, 하나하나의 박동이 무겁게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을 눌러 앉혔다. 어슴푸레한 중년 남성이 정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정희를 꿰뚫는 것 같았다. 그녀는 긴장한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고, 모든 것이 정지한 듯했다. 중년남성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방 안을 가득 메우며, 정희의 귀에 꽂혔다.
“여러분, 반가워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네요. 이렇게 긴장한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질문으로 마음을 풀어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평소 궁금한 게 있는데요, 우리 아이가 숙제라며 묻더군요.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자,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편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정희는 잠시 숨을 멈췄다.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 어떤 대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그저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가벼운 주제였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면접관은 이 질문을 통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 걸까? 그의 말처럼 정말로 가벼운 농담일까, 아니면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걸까? 정희는 면접관이 기대하는 대답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방황했다.
정희는 이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존재의 근본을 묻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다. 머릿속에서 ‘닭’과 ‘알’을 둘러싼 수많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가지만, 아무것도 이 순간의 긴장감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 속에는 뭔가 더 깊은, 미묘한 의미가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닭과 알의 관계, 그것은 순환이자 끝없는 반복처럼 느껴졌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삶에서 어떤 선택이 먼저이고 그 후 무엇이 따라오는지 규명하려는 시도와도 유사한 것이 아닌가.
닭은 알을 낳고, 알은 또 다른 닭을 만든다. 질문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온통 닭과 알만 떠올랐다. 순환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지만, 정희는 알았다. 문제는 그 순서가 아니라 그들 사이의 관계가 무언가 상징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닭이 먼저일지, 알이 먼저일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정희는 또 다른 생각으로 흘러갔다. 닭 이전에 알이 존재했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알이 먼저다. 닭은 조류의 일종으로 알을 낳는다. 하지만 알은 더 오래된 존재, 즉 파충류와 곤충이 남긴 유산이다. 정희는 알이 닭보다 먼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알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진화의 과정이 이어지며 복잡한 생명체가 태어났다. 그렇게 닭이 태어났으나, 정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닭이 낳은 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희는 마음속으로 자문했다. 닭은 알을 낳고, 그 알은 다시 닭으로 이어진다. 이 관계에서 닭은 선행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알은 또 다른 시작을 암시한다. 정희는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택의 고리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먼저인지 결정할 수 없는 이 순환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정의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희는 알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을 다시 규명하려는 듯했다. “내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계란”이라는 단어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독립된 존재로 구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그 경계는 흐릿한 물결처럼 모호했다. 정희는 삶의 여러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나’가 되는 과정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굳이 알을 계란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닭인가, 알인가?’ 정희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이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이클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낳고 있는지를 곱씹었다. 선택은 언제나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희의 마음속에 놓인, 부서지기 쉬운 알처럼 여겨졌다. 부서질까 두려운 그 알은 결국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먼저였는지 따져 묻는 것처럼. 과거의 선택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있었다. 알이든 닭이든 그 경계는 모호했고, 무엇이 먼저라고 쉽게 말할 수 없듯, 정희는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 흐름을 명확히 가를 수 없었다.
정희는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그 대답이 명확할 리 없음을, 우리가 가진 지식과 진리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닭"과 "알"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선후 관계나 중요성은 언제나 상대적임이 분명하다. 인류가 쌓아온 방대한 지식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뿐, 그 자체가 대상의 본질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정희는 학창시절 외웠던 생물학적인 분류 체계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분명 도서관의 분류방법과 매우 닮은 생물학적 분류 체계인 종-속-과-목-강-문-계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학이나 해부학, 생리학, 생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진리를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분명한 부분이 잔존한다. 모든 지식을 모은다 해도, 그것은 결국 불완전한 지식임이 분명하다. 객관적이라 믿는 것은 그저 믿음에 불과하다.
정희는 오히려 그런 이유로 어떤 개념이더라도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정보 처리 능력과 적응력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잘못된 믿음을 극복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학습하고 조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무엇을 안다는 게 모두 그런 식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타인의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행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럼 어떤 대답이어야만 저 면접관이 만족할 수 있을까?
정희는 머릿속에서 그 질문의 의미를 쫓기 시작했지만, 곧 면접관이 이어서 하는 말에 쏠린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대답하기 어려운가요? 아마도 당신의 선택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겠죠. 하지만 답변은 해 보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무언의 압박이 서려 있었다. 정희는 숨을 깊이 들이켰지만, 마음속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음… 알이 먼저였던 것 같아요,”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요?” 면접관은 이미 정희의 대답쯤은 예측했다는 듯 눈썹을 한껏 올리며 조롱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닭은 무엇이 되나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알에서 부화해 나온 존재라면, 그 닭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에 불과하죠. 그렇게 알에서 태어난다는 건, 당신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신념일 뿐 아닌가요?”
정희의 가슴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결국 대답은 반반의 확률이었다. 그걸 예측이라도 한 듯 기고만장한 저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다. 꼰대는 늘 자신이 꼰대인줄 모르는 법이니까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이런 무시를 받은 김에 한마디라도 말은 하고 싶었다. “아니요, 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정희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강해졌다.
여전히 면접관은 비웃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대답이 자신을 기쁘게 한 듯 말했다. “아, 그렇군요. 새로운 존재, 그것은 참 매력적인 생각이네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정도로 간단하고 순수할까요? 그리고 새로움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태어날 수 있는 건가요? 신도 아닌데 말이죠.” 그 말은 칼날처럼 정희의 감정을 찌르는 것 같았다. 정희가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정희는 그 표정이 분명 승자의 조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지금 하신 말씀은 대화가 아니라, 단지 저를 조롱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애초에 해석이 가능한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한 질문이잖아요. 어떤 답을 하더라도 반박할 수 있는 노리가 준비되어 있는. 그건 너무 불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만큼 서럽기도 했다. 얼마나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질문이 회사의 업무와 도데체 무슨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면접관은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롱? 아니,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전 정희 씨의 생각이 궁금한 것일 뿐이에요.”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벼웠고, 정희의 분노가 가시지 않을 만큼 얄밉게 굴었다. 게다가 면접관은 정희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는 무례를 범했다.
“그럼 면접관님은 무엇이 먼저라고 생각하시나요?” 정희는 의연하게 반박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대답하죠, 하지만 사실은 그 대답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안 그래요? 만약 그렇지 않은 사례가 있나요? 그리고 제 질문이 어려운가요?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설명해주면 되잖아요. 설명을 싫어하는 거 같이 느껴지네요. 습관적으로 정답을 찾지만 확신이 없으니 신념은 가질 수 없겠죠. 신념이 없으니 선택에는 항상 혼란만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거만함과 조롱이 깔려 있었다. 그 모습이 정희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너무 싫어졌던 그 기억이 정희가 지켜내고 있었던 두꺼운 벽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정희는 갑작스레 전가된 질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모욕적이고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도무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편한 감정이 그녀를 어떤 길로 이끌어 줄지 알 수 없었다. 분노를 느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른 시점에 패배를 선언하고 무릎을 꿇어야 할지.
지금 정희는 거대한 콜로세움에 놓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자를 굶주리게 하여 검투사와의 처절한 생존 게임을 관람하는 군중의 공격적인 시선이 괴롭기만 했다. 이 잔인한 축제 속에서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읽었던 로마의 집정관들의 우민화 정책이 떠올랐다.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여 시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지배자들은 더욱 굳건한 권력을 행사했었다. 수천 년 전의 로마 시대보다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여전히 그녀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그랬다.’ 정희는 생각했다. 섹스, 스크린, 스포츠. 가진 자들이 이런 유희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어낸 치졸한 유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마무리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칼질을 해야 한다는 강한 욕망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달갑지 않은 질문에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들하고 퉁명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콜로세움 속의 검투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자의 밥이 되는 건 더 싫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 너는 우리에게 필요한 훌륭한 인재야’라고 여길 만한 면접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건 그녀만의 세계였다. 질문을 던진 집정관은 싸움을 즐기고 싶어 했고, 그녀는 요리조리 피하는 모습으로 그 상황을 견뎌야 했다. 결국, 그들은 서로가 원치 않는 지루한 과정을 반복하며 이날의 면접은 조용히 끝이 났다. 패자도 승자도 없는 무의미한 시간의 허비. 그녀가 결국 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