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는 얼마 전, 눈이 예쁜 아이와 나눈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아이가 물었다. "꿈이 뭐야?" 그 물음에 정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순간, 어떤 대답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은 텅 빈 것처럼 느껴졌고, 마치 오래전부터 묻어둔 질문이 다시 떠오른 듯했다. 삶의 방향을 묻는, 그 단순한 물음에 정희는 어찌할 줄 몰랐다. 결국 정희가 내뱉은 말은 "내 꿈은 축구공이 되는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다.
아이는 크게 웃었다. 그 맑은 웃음소리가 정희를 안심시켰다. "사람이 어떻게 축구공이 돼?" 천진난만했다. 아이의 순수함이 무거운 생각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정희는 말없이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봐,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축구공처럼 동그랗지 않을까?"라며 자신의 배를 톡톡 쳐보였다. 그 웃음 속에 숨어 있는, 말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었다. 정희의 그 가벼운 농담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어른의 얄팍한 방패막이었음을.
아이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장난기 가득했던 눈빛이 사라지고, 무언가를 진지하게 떠올린 듯 보였다. "응,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축구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아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정희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답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왜 그럴 수 있어? 사람이 축구공이 될 수는 없는데?”
“응, 그런데 그건 꿈이잖아. 그러니까 될 거야.”
그 간단한 대답이 결국 정희의 가슴을 조이고 말았다. 숨이 막히는 기이한 느낌이었다.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의 문이 열리고 그녀의 내면이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정희는 꿈이 없었다. 정확히는 꿈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꿈'은 더 이상 자유로운 상상이나 욕망을 담은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점점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상징이 되어갔다. 더 구체적이어야 하고, 더 명확해야만 했다. 세상은 냉정하고 잔인했다. 노력과 성과라는 단순한 원칙으로만 돌아가는 듯 보였다. 그리고 오랜 방황 끝에 얻은 결론은, '꿈'은 결국 '좋은 직업'과 동의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책임으로 변질되었다.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사는 것, 그것이 정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속에서 인정받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실패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실패는 곧 무능을 증명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자신을 향한 비난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처럼, 언제나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게으르다고 자책해야하고, 죄를 지은 것처럼 후회에 빠져, 자신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말이다.
아이의 생각은 확연히 정희와는 달랐다. 그 차이는 가능성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사람조차 축구공이 될 수 있었다. 그 단순한 발상은 정희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찌릿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 자신이 바라보던 꿈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다. 직업과 성과,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의미했던 시절, 순수함이 가득한 상상이었고, 그 상상 속에서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지금, 정희는 꿈을 잃어버렸다. 꿈이란, 그저 실현 가능한 것들이 아니다. 정희는 불현듯 그 시절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삶의 무게가 내려앉은 어른의 세계에서, 가능성이라는 말은 안개처럼 흩어지고 사라진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든지 만들고 지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안개 속에서 방황하던 정희는 잠시나마 아이가 가리키는 길을 보았다.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현실을 초월한 것들이 분명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 누구에게나 보장된 자유였지만 결국 억압당하고 마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너머에 실재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임을 생각하는 것. 그것들은 바람처럼, 또는 시간의 흐름처럼, 스쳐 지나가버리고도 결코 손에 닿지 않는 것들. 정희는, 인간이 그 진실을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지푸라기 같은 가능성에 설렜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묻힌 진실을 끌어올려야 했다. 깨진 거울 속에 반사된 빛처럼 희미하게 흔들리며, 그녀의 손끝에서 멀어져 가는 지독한 현실들. 기억의 희미한 조각들이 실처럼 얇고 섬세하게 일렁이며 그녀를 저 먼 곳으로 이끌고 있는 힘. 정희는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사라지기 직전의, 불안으로 채워진 떨림이 찾아왔다.
콩이 심어진 자리에 콩이 난다는 말, 그 단순하고 어쩌면 무심한 진리를 사람들은 믿는다. 땅 위로 드러난 콩의 모습을 보면, 아, 여기에는 콩이 심겼구나, 쉽게 결론짓는다. 하지만 삶은 그런 일관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콩이 팥이라 우겨지는 순간이 오고, 그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저 보이는 것에 의존하며 밭의 사정, 그곳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는 듣지 않으려 한다.
꿈 역시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묻는다,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그 실현 가능성을. 그러나 꿈은 꼭 실현될 필요가 있을까? 아이의 눈에 비친 꿈이란 축구공처럼 가벼울 수도 있다. 발로 차고, 쫓아다니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꿈은 그저 꿈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
잠시, 정희는 자신이 해방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정희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수많은 존재들 사이에 자신을 던졌지만,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한 걸음 더 내딛기만 한다면, 지금 눈앞에 놓인 벽을 넘어, 진정한 자유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굳은 듯 그 자리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테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정희는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정희의 마음속에는 무수히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그 어떤 결정도 내리 못했다.
그와 헤어진 뒤로, 정희의 세상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빠져나가 버린 뒤, 그 빈 자리에 찾아온 무력감. 그녀는 그때부터 조금씩 자신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현실은 여전히 그녀를 단단히 둘러싸고 있었지만, 이전의 모습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형태만 남은 채, 그 속을 채우던 본질은 어느새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듯했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믿음은 배신을 준비하는 서곡일 뿐이라는 것. 배신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지금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기다림은 남지 않았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들. 그것들은 분명하지 않았고, 형태를 갖지도 않았다. 희미하게 메아리치듯,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속삭임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끔은 그 소리들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는 듯했으나, 다른 때에는 실체 없는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희는 소리들 속에서 점차 진실과 환상 사이, 불확실한 경계에 이끌려갔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혼란이 깊어질수록, 정희는 모든 원인을 그에게서 찾아내고 있었다. 그가 모든 붕괴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정희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구름 속을 떠다니는 감각, 발 디딜 곳 없는 공간 속에서 방향을 잃고 부유하는 느낌.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그 혼란은 어느새 마음속 깊숙이 꿈인지 알 수 없는 순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냈다. 정희는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를 의심해야했다. 미지의 세계가 손을 뻗어 오는 착각, 그 손이 실체인지 아니면 허상의 그림자인지 분간해야만 했으니까. 아이의 목소리와 그에 대한 희미한 감정들이 어지럽게 떠오르다 사그라지기를, 그렇게 반복했다.
기어코 잠복해 있던 불안이 튀어나왔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기엔 너무 빠르게 사라졌다. 바람처럼, 다시금 다가왔다가도 곧 멀어졌다. 자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조차 알기 어려웠다. 어쩌면 밤하늘에 걸린 별빛이, 때로는 바람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속삭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한낮의 어둠을 더듬는 일처럼 막막했다. 작은 신호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흩어져 있었다. 그 신호들에 답을 구하려 했지만, 정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파동은 언제나 그녀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내곤 했다. 그 파동들이 실체를 지닌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감정의 물결일 뿐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잡히지 않는 본질, 멀어져 가는 시간 속에서, 정희는 무엇 하나 제대로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