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들이 먼저 정희의 변화를 눈치 챘다. 그들이 나눈 조용한 대화들이 먼저 조용히 퍼져나갔다. 이후에는 멈출 수 없는 강물이 길을 만들어가는 듯, 소문도 점차 먼 곳으로 흘러갔다. 정희의 입가에 얹힌 미소, 부드럽게 변한 목소리, 마치 땅에 발을 내디딜 때마저도 가벼워진 걸음. 사람들은 그녀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를 수군거렸다. 소문은 조용히, 하지만 끈질기게 번져나갔다.
“정희가 그와 강의실에서…” “둘이 그런 사이래.” “정희가 그를 참 좋아했대.” 그야말로 각자의 방식이었다. 어떤 이는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고, 그 눈빛과 몸짓이 모든 걸 말해준다고 확신했다. 반면에 누군가는 그녀가 큰 상처를 입고 충동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실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 안의 변화는 여전히 그저 담담하게, 이름 없는 채로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소문은 언제나 진실의 그림자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것은 그저 흐릿한 잔상, 이미 색이 바래버린 채 떠다니는 파편들이다. 정희의 변화를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품은 창작물이다. 저마다의 해석을 덧붙여진 형상이 반드시 사실을 반영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굳어지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소문은 그들 속에서 이미 실감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정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이미 각자 가슴속에 자기만의 가설을 품었고, 질문이라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정희의 입을 닫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정희의 이야기는 그녀 자신의 통제 밖에서 흘러갔다. 정희가 느꼈던 떨림과 기대, 불안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색으로 덧칠하는 걸 즐겼고, 다양한 물감으로 채색된 해석은 정희가 붙잡고 싶었던 것들을 어딘가 아득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정희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정의할 수 없다는 뜻임을 깨달았다. ‘나’라는 단어는 정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타인의 언어와 시선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될 수밖에 없음을. 나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을. 소문은 언제나 작은 물방울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고요한 표면에 닿는 순간 그것은 미묘한 파동이 되어 점점 넓게 번져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파동은 잔잔함을 벗고 점차 파도로 자라나고, 마침내 해안에 닿는 거대한 흐름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물결은 더 거칠어져, 모래 위에 충돌하는 소리로 흩어진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게 사라진다.
그 순간, 정희는 하필 그 순간 그의 마음과 같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것이 소문의 씨앗이 되었고, 소문은 곧 그녀를 또 다른 모습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정희는 그 안에 갇혀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소문은 멈출 줄 몰랐고, 끊임없이 확대되고, 변형되었다. 조용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히며 정희를 주목했다. 만남도, 상처도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듯이.
어느새 정희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시되고 있었다. 그녀가 느꼈던 사소한 감정들, 속으로만 삼켰던 조용한 결단조차, 어느 것이 그들이 만들어낸 진실인지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혼탁했다. 그 것은 그녀가 더 이상 보호받지 않는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동시에 그녀가 조금 더 성숙해졌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희를 순진하고 앳된 아이로 여기지 않았다.
정희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어른이 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나눈 순간들이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열 명 중 여덟이 옳다고 말하면, 그건 곧 옳은 일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소문은 단지 말의 나열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과 해석이 섞여 또 하나의 강력한 실체였다.
두 사람은 최소한 소문에서만큼은 자신들의 의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님은 분명했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한 이야기 속에 갇혀 있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다듬어진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그들의 세계에 다시 갈수 있었다. 소문은 그들의 진실을 넘어섰고, 이제 그들의 현실을 다시 쓰고 있었지만 저항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당혹스럽고 못마땅했다. 하지만 곧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두 사람을 하나로 보고 있었다. 더운 날에도, 비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추운 날에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그와 함께하는 순간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와 보내는 시간은 더 이상 주목받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의 세계는 그로 가득 차게 되었다.
정희는 거의 매일 그를 만나서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그는 강력한 중력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정희는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정희에게 사랑은 더디게 자라는 꽃봉오리처럼, 뜨거운 햇살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억누르는 감정이었다. 그의 손길이 스칠 때만, 정희가 숨겨둔 깊은 곳에서 천천히 열렸다. 그 감정은 기묘하게도 기쁨과 두려움이 얽힌 복잡한 모양이었다. 꽃이 피었을 때 정희는 온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두 사람의 감정은 밀도 높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탐닉하며 깊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둘만의 비밀이 늘어났다.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정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기쁨과 고통이 얽혀 있는 이 복잡한 감정, 그를 향한 갈망이 깊어질수록, 정희는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은 그녀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동시에 깊은 어둠 속으로 던졌다. 사랑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정희의 삶에서 그라는 존재는 공기처럼 당연하고 필수적이었다. 그가 있어야만 제대로 숨 쉴 수 있었다. 그는 정희의 세계를 감싸주었다. 그녀의 불안과 의문을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항상 정답을 알고 있었고,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처럼 여겼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가장 깊숙한 취약함을 드러낼 때마다 그녀는 불안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너무 쉽게 꿰뚫어보는 건 아닐까, 그가 자신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으로 지겨워질 것 같은 마음으로 불편했다.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의존이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정희는 간절히 바랐다.
정희는 그를 자주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자랑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를 소환했다. 그만큼 그가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정희는 그가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빛나게, 더 깊이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은 정희의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시기심일수도 있었고 정희의 과도한 의존성을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때론 진심이 걱정을 넌지시 건네기도 했다. “그가 너를 외롭게 만들 거야,” “진짜 사귀는 거 맞아? 너무 그에게 열중하는 거 아니야?” 하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오히려 정희에게 보잘것없는 조연에서 벗어나 마침내 주연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사람들이 주목했고 정희는 즐겼다.
하지만 정희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와 함께할 때는 모든 것이 온전하고 완벽하게 느껴졌지만, 그가 없는 시간은 끝없는 소용돌이처럼 그녀를 집어삼켰다. 처음 그 소용돌이는 미미한 미풍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걱정이 강해질수록, 정희는 의심과 불안의 나락으로 밀려났다. 그것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빈자리는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를 지워나가는 듯했다. 정희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가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녀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한명 두 명 사라지더니 어느 덧 그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면서도 이상하게 정희의 불안을 꿰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