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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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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18. 2024

(18)

정희는 차라리 그 누구도 자신을 못 알아보기를 원했다. 억압적이고 모순된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적 저항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가 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자신을 찾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비록 자신이 지워지거나 잃어버릴지라도 나머지는 지키려는 감각. 그래서 짙은 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안개는 그녀의 마음처럼 정희를 서서히 감싸며 외부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유용했다. 그 안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그녀를 애써 찾지 않는 한, 그녀는 더 이상 그 무엇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의 소음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희는 잃어버린 자신을 채워줄 존재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야만 온전한 형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구원의 손길처럼 그녀의 부족함을 채웠다. 아직 미숙한 그녀는 그를 통해 새로운 현실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다. 오직 그와 정희만 존재하는 평온하고 안전한 세계. 그래서 정희는 그에게 더욱 의지했다. 안개가 가득 찬 그 세계에서 그는 정희의 일부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정희를 감싸면서도, 삼켜가는 존재였다. 정희가 원한 것인지 그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분간할 수는 없었다.

기괴한 형상이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모양. 어찌 보면 그는 정희에게 그 무엇보다도 위협적인 그림자였다. 그가 가까이 있을수록, 정희는 점차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해 그의 감정에 몰입할수록. 어느새 그의 반응에 따라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찾아왔다. 마치 파도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정희는 그의 감정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정희는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단 하나였다. 그가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그 바람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는 덧없는 꿈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현실은 언제든 그녀 앞에 다가와 눈을 맞출 것이었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정희는 이 희미한 허상 속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안개가 걷힐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개 속 그림자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희는 그에게 의지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삼킬까 두려워하는 모순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마저 어쩌면 진짜 그녀가 아닌, 안개 속에서 조각된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가 자취를 시작했다. 그들만의 현실이 담긴 작은 공간. 두 사람의 손끝에서 하나하나 채워진 방은 오래도록 바라던 것들로 조금씩 완성되어 갔다. 벽에는 그가 좋아하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작은 테이블 위엔 그가 늘 마시던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방 한쪽 책장엔 그가 아끼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오롯이 창가 한 귀퉁이에만 정희가 고른 작은 식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식물은 정희의 흔적을 증명하듯 그곳에 단정하게 놓여, 햇살을 기다렸다.

정희에게도 그것은 새로운 변화였다.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 이상의 것. 마치 오랫동안 바라왔던 삶의 일부분을 맞이한 것 같은 기분이 그녀를 채웠다. 그의 자취 생활은 어느덧 정희에게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세계에 정희가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의 주인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정희는 거의 매일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연극의 무대에서 자신의 배역을 묵묵히 소화하는 배우 같았다. 식사를 준비할 때만큼은 조금 더 신중했다. 칼날이 도마에 부딪힐 때의 둔탁한 소리, 채소를 씻으며 손끝에 닿는 차가운 물결, 익숙한 동작 속에서 떠오르는 그의 얼굴. 정희는 늘 그 순간을 기다렸다.

만약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어린 나이에 주부처럼 사는 그녀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희는 상관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식재료의 껍질을 벗기고, 손끝으로 질감을 느끼며, 그가 좋아할 맛을 조심스럽게 짐작하는 것. 그녀의 하루는 그렇게 작은 순간들의 정밀한 연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특별히 정희의 요리에 불평하지 않아도, 정희는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세한 표정만으로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꺼리는지 읽어냈다. 그 순간이 그녀에게 소소한 기쁨이었고, 단순한 역할 수행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마음이었다. 재료 하나하나가 그의 취향에 맞춰져 가는 과정은, 그녀에게 있어 무언가를 창조해 나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녀의 고유한 방식이었다.

정희는 요리에 서툴렀다.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만큼 손끝이 따라주지 않았다. 자주 칼끝은 흔들리고, 물방울 같은 실수들이 테이블 위에 흩어졌다. 재료를 자르다가 손이 베이고, 조리 시간은 어긋나기 일쑤였다. 그녀는 매번 실패의 자국을 남긴 손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는 정희가 실수할 때마다 짜증 섞인 한마디를 건넸다. “그만하지 그래.” 배고픔을 참을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그 표정으로 마치 정희를 걱정한다는 듯한 뉘앙스. 그에게 요리는, 그냥 무언가를 채우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배달을 시키면 되고, 밖에서 사 먹으면 그만. 식사는 사소한 일. 저희가 쏟아 붓는 시간과 정희의 노력은 낭비. 그에게 먹고, 숨 쉬고,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들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에 불과했다. 정희만 유별나게 그 한 끼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감각을 말로 너무 이상하게 생각했다.

정희에게는 그저 허기를 달래는 한 끼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희는 음식을 만들며 자신을 갈아 넣을 것처럼, 자르고, 다듬고, 끓이고, 불 위에서 뒤집었다. 그가 그것을 입에 댈 때 작은 미소 하나를 떠올리기를 바랐다. 그녀가 준비한 이 음식이 그의 마음에 닿기를, 그것이면 충분했다. 서툰 손끝으로라도, 엉성한 맛일지라도, 자신이 만든 온기를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의 불만에도 정희는 달라지지 않던 이유였다. 정희에게 있어 이 노력은 그와 이어져있다고 느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가 무심하게 숟가락을 움직이고, 아무런 감상 없이 입을 다물어도, 정희는 그와 공유할 수 있는 작은 세계를 믿었다. 그가 음식을 입에 댄다는 행위, 그것은 정희에게 그가 여전히 자신의 삶에 머물러 있다는 신호였다. 그래서 여전히 정희는 그가 한 입 베어 물 때, 그녀의 시선은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미세한 변화라도 감지하려는 듯, 그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그저 습관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도 그의 노력 같았다. 그래서 그가 정희의 요리를 삼킬 때마다 그녀의 애정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기화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랐지만, 돌아오는 건 한낱 무관심. 그녀의 요리는 그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입증하는 그의 담담한 표정이 반복되자 그녀는 점차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희의 서투름과 그의 짜증이 교차하며,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정희는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느끼며, 점점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그의 짜증이 정희를 누르는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정희는 가끔 칭찬을 말해달라는 응석을 부렸다. 투정이 아니라 간절함이었다. 연약한 자신을 그가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정희의 노력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그리고 네가 애야? 왜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해? 거짓말이라도 하라는 거야? 그냥 남들처럼 조금만 참고 그냥 더 노력해 줄 수 없어?”

민망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의 말은 정신이 혼미해 말문까지 막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자책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섭섭한 마음에 울컥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정희가 그토록 바랐던 사랑은 단순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그의 말 속에서 정희는 깨달았다. 모든 것이 조건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그것이 사랑이라 믿고 있었다. 정희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그에게 ‘지금 네가 나에게 하는 짓은 뭔데?’라고 물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언제나 정희가 무언가를 내어주어야 하는 일방적인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정희는 그 안에서 점점 작아져 가고 있었다.

정희는 그가 옆에 있는 순간이 어색했다. 숨소리, 작은 움직임조차 신경이 거슬렸다. 그녀의 마음은 조화롭지 않은 두 음이 겹쳐져 만들어낸 불협화음처럼, 이질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서히 균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대와 실망이 뒤섞여 그녀를 감정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고, 그 속에서 그녀는 그 일의 원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자신의 서투름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그의 무심한 태도가 더 주요한 원인이었다.

정희는 사랑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진 그의 이기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희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압박을 가하는. 정희는 그의 사랑을 붙잡으려고 자신을 지워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더 노력해"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정희가 무언가를 포기하고 그에게 맞춰야 한다는 일방적인 요구였다. 그의 태도는 마치 정희를 더 가까이 끌어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분리시키려는 듯했다.

정희는 특별한 이유 없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요구에 맞추려 애쓰면서,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재단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그와의 만남이 곱씹어졌다. 그때만 해도 정희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의 기대 속에서 조금씩 무너지는 자신을 흐릿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책임, 존중, 지식, 인내—그는 언제나 그것들을 요구했지만, 정작 그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 단어들은 모두 정희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그가 나열한 미덕은 정희가 넘기에는 어려울 만큼 둘 사이를 가르는 견고한 벽이었다. 더 자유로워지는 그와 구속받는 그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가 정희와의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수록 그에게서 정희는 희미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모순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걸까?’ 매번 그를 위해 맞춰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분명 그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가고 싶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을 더 깊이 갉아먹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사랑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지치게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아직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희생할 수 있었다. 희생 없이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고, 그의 말처럼 정희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아프게 하면서도 인내하는 것이 그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책임감이 자신을 그토록 오랫동안 속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의 증거라고 믿으며, 매일같이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기를 바라며,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이뤄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최소한 정희에게 지금 사랑은 그녀 자신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희는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온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더 괴롭히는 길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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