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그것은 단순히 움직임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붙잡아 정지시키고, 한 자리에 묶어두는 자연의 무서운 힘이었다. 그녀를 지탱해왔던 일상은, 그저 평범하고 반복적인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녀를 고독의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두고 있었다. 점점 더 무겁고 견딜 수 없게 억누르는 힘.
시간은 멈춰버린 듯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과 과거에 머무르려는 힘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정희는 그 속에 갇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바람조차 불지 않는 방 안에 고립된, 그 정지된 공간 속에서, 정희는 더 이상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정희는 그날, 진실한 자신과 마주했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서 소중히 간직해왔던 기억들이 어느새 산산이 부서져 있음도 또렷했다. 한때 빛나며 그녀를 지탱해주던 조각들은 이제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형태는 흐려졌고, 의미마저도 잃어버린 채 낯설게 흩어진 파편들로 남아 있었다. 그 기억들은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멀고 이질적인 모양이 되어버렸다.
다행인지, 그는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정희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희는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속박하는 감정의 잔재 속에 갇혀 있었다. 문제는 정희였다. 한동안 그녀의 세상은 온전히 그로 가득 차 있었던. 그는 정희에게 끝없이 에너지를 끌어내는 근원이었고, 동시에 그녀의 고통과 혼란을 증폭시키는 존재였다. 그의 곁에서만 그녀는 살아 있음을 느꼈고, 그와 결별한 후 정희의 세상은 생기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여전히 정희의 관성이었다. 이미 부서진 관계였지만, 그녀는 그의 궤도 안을 맴돌았다. 딱히 이끌림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다. 그를 떠났으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뿐. 한때 분명했던 사실들조차 닿을 수 없는 꿈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 순간들이 실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억은 점차 더 흐릿해졌다. 어떤 것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인지 그녀는 폭력과 고통 속에서조차 어쩌면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견딜 수 있었다.
그에게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흔적을 찾으려는 몸짓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놓아버릴 수 없는 절박함 속에서 또다시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정희는 그것을 부정하려 애쓰면서도 끊임없이 그를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과거의 순간을 끌어안으려 애쓸수록 그것들은 이미 환영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했다. 기억의 파편들을 언제든 잡아 채기만한다면 모든 게 분명해질 것 만 같았다.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을 듯하다 더 멀어질 뿐이었다. 텅 빈 공허 속으로, 그리고 점점 더 깊이. 정희는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점점 녹아내렸다. 시간이 사라지는 만큼 그 속도로.
그에게서 갓 벗어났을 때,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난 듯 평온했다. 그러나 껍질에 불과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의 흔적을 품고 있었고, 오직 의지의 힘만이 그 어둠 속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었던 순간은 서서히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그녀의 피부에 문신으로 남아 있었다. 지우려는 흔적들. 그 노력의 시간이 가끔 바람결처럼 다가와 따스하면서도 익숙한 위로를 전했다. 하지만 그 위로에 몸을 기댈 때면 가시로 바뀌었다. 그림들이 상처로 되살아나 다시금 아프게 쑤셨다. 그녀는 그를 잊고 싶어 했다. 잊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희는 점점 더 깊은 그리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애달팠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에 갇혀 있었던 감정. 어둠 속에서 잔인하게 무게를 더해가며, 삶에 대한 의문과 불안을 키워낸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직 고립된 공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흔들리는 정희의 현실이었다. 분명 그녀의 발길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희는 자신도 모르게 그가 남긴 흔적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기억 속의 잔상은 중심을 비틀고,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그녀를 다시금 그 궤도로 이끌었다.
정희는 매일 차이를 알아차릴 수 없는, 복사된 시간들이 단조롭게 이어졌다.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밤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느려지는 감각이 점점 더 크게 출렁였다. 주변은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지만, 정희의 마음은 예리한 칼날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찌르려는 움직임처럼, 그 긴장은 방 안의 평화를 깨며 침대 시트의 주름마저도 뒤틀어 놓았다. 그 주름 사이로 그녀의 마음도 함께 헝클어져, 이리저리 얽힌 채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밤이 주는 압박감은 과거의 기억들을 더욱 또렷하게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더욱 깊은 고독 속으로 빠져들었다. 별빛조차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듯, 그 어둠 속에서 정희는 더 또렷해진 상태로 그저 홀로 견뎠다.
지금의 정희에게 꿈이나 희망은 헛된 말이었다. 그것은 이미 무너져버린 믿음 뒤에 남아있는, 허공에 흔들리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허전했다. 때로는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무엇인가라도 따라가려 했지만, 그 빛조차 다가갈수록 더 아득해졌다. 붙잡으려 할 때마다 그가 남기고 간 공허한 자리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고, 그 자리에 점점 더 가라앉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랑의 흔적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알 수 없는 뜨거움이 남아 있었다. 그 뜨거움이 또다시 가슴에 불꽃을 던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 것도 알았다. 잔해가 가득한 도시의 폐허처럼, 정희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씩 정희는 어느 날의 가벼운 구름처럼 자신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의 기억은 그날따라 흐릿한 안개처럼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일상의 무게가 잠시 사라지기를 허락하는 짧은 휴식 같은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달콤했던 기억들은 이내 그를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며, 그가 다가올수록 기억 속의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결국 날카로운 고통으로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
그와의 추억은 매일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어떤 날은 따스한 햇살처럼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주었지만, 또 다른 날은 잔인한 바람처럼 그녀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정희는 자신의 내면을 그리는 화가가 흐릿한 구름의 형상을 붙잡으려 애쓰듯, 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감정들을 이해하려 했다. 그 감정들은 명확하지 않지만, 서로 다른 색으로 얼룩진 캔버스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 뒤엉켜 있었다. 정희는 이 복잡한 색채들 속에서 헤매며, 도무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의 무게에 이끌렸다.
정희는 조용히 그 기억들을 응시했다. 그 속에는 깊은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이미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련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이 점차 흐릿해지듯, 그리움도 점점 옅어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고통과 기쁨이 교차하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정희는 여전히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경계가 무너지면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흔들리는 감정의 실타래를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기억은 늘 예상보다 더 복잡하고, 형태를 흩뜨려 버리는 고약한 습성이 있었다. 정희가 품었던 사랑은 미움이 되어 있었지만, 그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 기억을 힘들게 붙들수록 그녀를 더 멀리 밀어내는 힘을 느꼈다. 그것은 무너지는 담벼락 앞에 홀로 서 있는 것만큼이나 두렵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익숙한 주변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서있는 공간마저 그녀를 환영하지 않는 듯, 흐릿하게 지워졌다. 정희는 차라리 공기 속에서 사라져버린 그림자처럼 투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