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0만 명의 안전을 위해 용기 낸 평범한 시민들에게 힘을 보태주세요
인구의 약 절반을 피난길로 내몰고
전 국토의 50%를 파괴시킬 수 있는 재난…
무슨 이야기일까요? 재난 영화 속 상상의 시나리오? 아니면 저 멀리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남의 나라 이야기?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 바로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 대비 원자력발전소 밀집도 세계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습니다. 현재 총 8기의 원전이 위치해 있는 고리 원전단지는 총설비용량으로도 세계 1위에 빛(?)나죠.
지난 10월 31일 국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원전사고 안전 불감증에 경고를 날리는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남한 인구의 절반을 길거리로 내몰고 국토의 절반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겁니다.
‘사용후핵연료’란 원전에서 연료로 사용된 후 남은 폐기물인데요. 높은 열과 강한 방사선을 내뿜고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최소 10만 년 이상 차폐시켜 안전하게 보관해야 합니다.
이번 토론회에 참석한 미국 천연자연보호위원회(NRDC)의 강정민 선임연구위원은 사용후핵연료 저장조의 사고 시뮬레이션 결과를 토대로 다음의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부산과 울산의 경계에 위치한 고리 원전 3호기 내 사용후핵연료 저장 수조에서 화재가 발생할 시 평균 9천㎢, 최대 국토의 50%가 넘는 5만4천㎢의 지역이 피해를 입게 되고, 피난 인구는 평균 500만에서 최대 약 2,430만에 이른다는 결론입니다.
이처럼 위험한 물질의 처리 방법과 장소를 아직 찾지 못한 우리나라는 지난 30년간 발생한 핵 쓰레기를 원전 내 수조에 임시로 저장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 당시 일본 총리였던 간 나오토는 사고 직후 원자로뿐만 아니라 사용후핵연료 저장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도쿄 및 수도권 거주자 포함, 최대 5,000만 명을 피난시켜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검토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 토론회의 참석자이자 원전 정책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본 히펠 프린스턴대 교수 또한 만약 후쿠시마에서 사용후핵연료 저장 수조에서 화재가 발생했었다면, 사고 피해 범위가 최대 30배로 넓어졌을 수도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고리원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자로가 밀집해 있어 사고 확률이 더 높고, 규모도 최대여서 사고 시 누출될 수 있는 방사능의 양도 더 많습니다. 더 무서운 건 사고 시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하는 반경 30km 인근에 후쿠시마와 비교할 때 약 22배에 달하는 382만여 명의 시민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고리원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산항, 해운대, 울산석유화학단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이 위치하고 있어, 사고 시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도 막대합니다.
자, 이 정도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대응은 원전의 규모를 단계적으로 축소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용납할 수 없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원전 축소가 아닌 ‘확대’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게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나라입니까? 원전 인근에서 관측이래 최대 규모의 지진이 발생하고 500 차례가 넘는 여진이 뒤따랐지만, 원전 건설로 이득을 얻는 대기업, 관료, 언론, 학계의 공고한 카르텔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원전은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대안이 없다는 철 지난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일인 오늘 울산지방법원에서는 그린피스 시민활동가들의 항소심 1차 공판이 열렸습니다. 평범한 시민인 이들은 지난 2015년 10월 고리 원전 부지 밖에서 신규 원전 건설 폐지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직접행동을 벌였습니다. 이미 세계 최대 규모인 고리 원전에 또다시 2기의 원전을 추가 건설하는 데 따른 용납할 수 없는 위험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시민활동가들은 “인자 원전 고마 지라, 쫌!”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친 후에 자진 해산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평화적이고 공익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3월 울산지방검찰청은 주거침입죄와 집시법 위반(미신고 집회) 혐의로 활동가들을 불구속 기소했고 징역 1년을 구형했습니다. 활동가들은 해당 시위가 주거침입죄 성립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고, 평화적이고 공익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4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 7월 주거침입에 대해서는 무죄를, 미신고 집회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의 행위는 장점과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원자력발전에 대해 맹목적인 비판이 아니고 상당한 근거와 대안을 갖고 의사를 표현한 것”이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원심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민활동가들은 앞으로도 수개월간 헌법에서 보장하는 평화적 시위의 권리를 위해 법정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린피스를 포함한 다양한 시민단체와 수많은 시민들이 용납할 수 없는 원전의 위험에 대항해 단계적 탈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안전하고, 깨끗하며,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지속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9월 경주 지진 이후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느끼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그 결과, 시민들을 대변하는 국회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핵 마피아만을 위한 브레이크 없는 원전 정책에 제동을 거는 법안들이 제출되고 있는 겁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민 투표를 통해 신규 원전 건설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던 영덕에서는 최근 군수가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신규 원전 관련된 업무를 중단한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지방정부들 역시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울시, 경기도, 충청남도, 제주도는 공동으로 「지역에너지 전환」선언을 하고 지자체 차원에서 에너지 절약을 하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재생가능에너지를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했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더 이상 대기업과 소수 부패한 이익집단에 의해 시민들의 안전한 삶과 풍요로운 미래가 위협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린피스는 지난 9월 충분한 안전성 검토가 수반되지 않은 정부의 부당한 신고리 5,6호기 건설허가 결정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전국의 559명 시민들이 이 소송의 공동원고인이 돼 주셨습니다. 거리에서, 법정에서, 국회에서 시민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더 많은 분들의 참여와 연대가 필요합니다.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소수 부패한 권력자들과 대기업이 아니라 시민들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외치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견제되지 않는 자본의 힘과 이권에만 관심 있는 관료들의 결탁이 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최근 많은 시민들이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인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절망에만 빠져 있지 않고 변화를 위해 행동한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자긍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안전과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평화적 행동에 나섰던 용기 있는 시민활동가들에게 따뜻한 응원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그린피스도 시민이 만들어가는 에너지 전환의 길에 항상 함께 하겠습니다.
글: 장다울 /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선임 기후에너지 캠페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