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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May 08. 2022

수세미가 있던 풍경

수세미를 가지고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게 되면 손톱이 순식간에 거칠해진다.

문득 옛날 수세미가 떠올라 인터넷 검색을 하니 팔고 있어서 잠시 놀랐다. 이제는 옛날 수세미는 당연히 사라졌으리라고 마음대로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뜰 한켠을 보면 주렁주렁 열렸던 수세미.

지금은 수세미가 다양해서 아쉬울 게 없다. 부드러운 용도, 거친 용도, 중간 용도..... 수세미의 세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려 쓸 수가 있다. 그런데도 어딘지 아쉽고 허전하다.


어릴 적 넓은 뜰은 흥미진진한 놀이터였다. 나무들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잡초마저 구경거리였다. 요즘 아이들이 보면 우습고 하찮을 것도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이 놀잇감이었다.


뜰의 한쪽 구석에는 늘 노란 꽃을 단 수세미가 얼기설기 세워놓은 나무 기둥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호박꽃보다는 작은, 그러나 그 모습이 비슷해서 그렇게 공중에 달려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호박꽃이나 박꽃인가 보다 하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노란 꽃이 많이 열리는 때는, 동네 아줌마들은 수세미도 많이 열릴 거라고 했다.  

모두들 얻어 가려고 일찌감치 선심을 쓰면서 예약까지 해놓지만 한 개씩 돌아가기도 바빴다.  





노란빛의 수세미 꽃이 서서히 말라서 떨어지면 수세미가 점차 여물어갔고, 그걸 손으로 만지면 폭삭하고 물컹한 느낌에 우리는 자주 손자국을 냈다.

그럴 때마다 수세미 말려 죽인다는 성화를 덤으로 들어도 다음날이면 또다시 살금 거리고 몰래 가서 그걸 손으로 꾸욱 눌러보곤 했다. 푹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가는 적도 있었지만 도대체 무엇이 안에 들어있길래 그렇게 물컹한 지 늘 신기했다.   


그 당시 이 수세미는 아주 요긴했다. 짚으로 말아서 수세미로 대용하던 때라, 어서 수세미를 수확해서

사용할 수 있기를 동네 아줌마들이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세미의 고운 결은 주부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


수세미가 여물어 마른 껍질을 까면 고운 상앗빛의 스펀지 같은 속살이 드러났다. 그런데 수세미로 쓰기 위해서는 수세미에 가득 찬 액체를 빼야 해서 우리가 그걸 꾹 눌러보고 싶어서 아무리 곁에서 서성거려도 못하게 했다.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찢어지기 때문이다.

수세미를 눌러 나온 물조차 버리지 못하게 했다. 미끈거리고 노리끼리한 물을 어디다 쓸지 물어봐도, 알 필요 없다는 일언지하의 퇴짜를 놓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수세미를 수확할 때쯤이면 물렁하고 폭신하게 만져보는 느낌이 더 좋았지만 그만큼 감시는 더 심해졌다. 물론 수세미가 열린 높이가 우리의 키로는 더 이상 어림없었지만 대꼬챙이를 가지고 찌르는 재미를 눈치챈 어른들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다. 수세미 말려 죽이려고 그러냐며 감시는 더 엄중해졌다.   


수세미를 따는 날은 동네 아줌마들을 불러 모으러 골목을 돌고 돌았다. 모두들 수세미를 따면, 덩굴 아래서 손등에 무엇을 잔뜩 발라 마구 문지르고 있었다.

신기해서 내가 바라보면 이담에 희고 이쁜 손을 가진다면서 따라 하라고 했다. 나도 아줌마들처럼 따라서 손등에 열심히 발랐다. 별로 효과가 나는 것 같지 않아 나는 시시했다.

아줌마들은 모여서 무엇이 그렇게 키들거리도록 좋은지 열심히 손에 발랐고 수세미를 짜고 나온 그 누르스름한 액을 물에 타서 세수까지 했다. 그리고 수세미까지 공평하게 나눠가지고 갔다.





지금 생각하면 설거지에 지친 아줌마들의 거친 손에만 수세미의 액이 효능이 있었던 것 같다. 

주방장갑 같은 사치품은 없었을 때니 수세미의 효용을 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수세미가 드러낸 미색의 속살은 그해 내내 부엌과 우물 터에 늘 있었다.

수세미를 까면 그물처럼 엉겨 붙은 미색의 단면들이 서로 꽉 물려 있다. 요즘의 어떤 비싼 수세미보다도 튼튼하다. 무엇보다 요즘 수세미처럼 손톱이나 손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부로 하고 있을 때, 수세미처럼 그게 뭐냐, 는 핀잔을 받는다. 머리가 엉켜 있을 때도 수세미 같다고 한다. 수세미는 형편없는 상황을 흔히 일컫는 말로 사용되지만, 수세미의 용도를 보고 자란 나는 그 말이 좀 불편하다.

아줌마들이 얼마나 그 수세미 하나 얻어 가려고 했었던지, 그리고 얼마나 손등을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던지.  

지금 아무리 우리가 멋진 주방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시절, 노란 꽃이 피던 천연의 수세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아무리 멋진 소품으로 주방을 치장한들 그런 멋스러운 수세미 하나 가질 수 있겠는가.


옛날 수세미는 여성들의 손보호 장치까지 곁들이던 멋진 주방도구였음을 이제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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