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되는 것 = 부모의 영광 = 하나님의 영광
나 스스로를 판옵티콘에 넣다
목회자 자녀가 ‘어긋나지 않는 것’도 목회자를 평가하는 데 큰 항목이 된다. 자신의 자녀를 얼마나 잘 키워냈고, 신앙적으로도 잘 지도해 왔는가도 목회자의 덕목처럼 여겨지며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한다. 물론 꼭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자녀의 됨됨이나 성적, 행동, 취업 여부 등이 그 부모의 '부모됨'을 평가하는 일이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지만, 목회자 자녀의 평가 항목에는 ‘신앙심’도 더해지는 것 같다. 그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난 늘 나 자신을 ‘판옵티콘’에 넣곤 했다.
예배. 어느새 이것이 나의 신앙인지 가스라이팅 당한 것인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출석 도장이 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10살 때부터도 나는 엄마 옆에 정자세로 앉아 예배를 드렸다. 부흥회를 하면 맨 앞에 앉아 졸지도 않고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내가 졸면 뒤에서 누가 흉볼까, 엄마 아빠에게 말할까 두려웠던 기억이 있다. 예배를 빠지면 목사 딸이 예배 안 한다고 할까봐 나를 다그치며 예배했다. 대학 시절에도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를 빠진 적이 많지 않다. 1시간 반을 통학 할 때도, 심지어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게 된 2년 동안에도 수요일, 금, 토, 일요일에 "우리 교회"를 갔다가 다시 올라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 동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빠질 때가 더 많았고 수요예배도 금요 기도회도 드리지 않았다. 나에겐 매우 엄격했던 부모님이 내 동생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난 의문이 들 때가 많았는데 어차피 빠지면 내 마음도 불편하니 난 예배를 계속 갔다.
같은 목회자 자녀이자, 첫째인 내 신랑도 나와 마찬가지로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를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결혼을 한 후에도, 아이를 낳고 나서도 모든 예배에 출석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인지, 습관인지, 세뇌인지, 압박감인지 잘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고 반항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의적으로, 그냥 좋아서, 기쁘게 다니고 있다. 쉽지 않지만, 그냥 내가 믿는 분을 더 자주 보고 싶고, 그 분이 좋아하시는 일이니까 하는 답이 내려져서 감사한 마음으로 다니고 있다.
지금이야 그렇게 되었다지만 어린 시절 나 자신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고는 얼마나 다그치며 예배를 드려왔는지 인간적으로는 내 스스로가 약간은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잘 지켜낸 것에 대해 감사하기도 하다. 습관이었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나만의 무의식이었든, 엄청난 초자아의 억압이었든 그 무엇이었든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부분이다.
공부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공부를 잘해야 했다. 잘하고 싶었다. 아무도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고 성도들도 나에게 공부까지 터치하지 않았지만 잘 해내고 싶었다.
작은 개척교회 목회자인 아빠를 둔 우리 가정의 경제 상황은 평탄치 않았다. 굶지 않고,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셨다고 고백하는 아빠지만, 내가 체감하는 우리 집은 가난했다. 학원은 생각도 못했고 문제집을 자주 사야 하는 신학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 말이다.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환경이었음에도 잘 해내고 싶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자 부모의 영광이 되리라 믿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엄청 채찍질하며 공부를 했다. 다행히 주님의 은혜로(늘 우리 아빠의 고백에 나는 맞다고 하면서도 내 노력과 수고는 배제된 듯 하여 내심 서운했지만) 성적이 좋았고- 쉽지 않았다 결코- 그래도 내로라하는 대학에도 갔다. 대학에 가서도 등록금이 빠듯할 것을 알았기에 죽어라 공부를 했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다. 자랑같지만 자랑이라기 보다는 내가 그만큼 절박하고 치열하게 살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꼭 목사 딸이라서가 아니라 내 욕심으로, 부모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내가 잘 해내고 싶었기 때문에 등등 공부의 이유는 수도 없겠지만 목사 딸로서 나를 바라보는 많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는 나만의 잣대와 채찍으로 나 자신을 계속 달리게 했던 것 같다.
이제는 이런 외적인 것들로 나 자신을 다그치려 하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가족, 내 부모 외에도 교회의 어른들, 교회 안에서의 이목들이 나자신의 행보를 결정해 나가는데 무의식적인 기준과 잣대가 되는 것은 여전하다.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눈을 의식하면서 예배를 가거나 나의 업적을 세워가거나 나의 아이들을 만들어 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므로. 하지만 그것이 나의 올무가 되거나 내 아이들의 올무가 되지 않도록 계속 의식하고 벗겨나가야 할 것이다. 그건 아마 내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다.
[사진출처] The Guard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