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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Feb 27. 2023

신부님들의 비빌언덕,
아르스 대성전

프랑스 성당 이야기 #16

  2009년 6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사제들의 해 Year for Priests'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한 사제를 언급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분처럼 한번 멋들어지게 살아보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끔 사제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었고 현대 사회에 들어 젊은이들은 더 이상 사제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사제직이 얼마나 소중한지 세상에 알리고자 했고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사제들을 독려하면서도 부족한 점을 채워주려고 했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와 사제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께서 날마다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완전한 자기 봉헌의 삶에 정진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열심한 기도의 삶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열정적 사랑이었습니다. 
(중략)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믿고 계십니다. 아르스의 본당 신부의 뒤를 따라, 여러분도 그리스도만을 섬기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화해와 평화,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09년 6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언급한 한 사제는 바로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Saint Jean-Marie Vianney였습니다. 사실 사제의 해도 이분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서 이뤄진 것이었죠. 교황이 이토록 한 사제에 열광한 것은 비안네 신부가 전 세계 주임 신부들의 주보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보성인은 수호성인이라고도 하는데 돌아가신 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 혹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기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비안네 신부는 곧 전 세계 모든 성당에서 *주임으로서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는 신부님들의 수호성인인 것입니다.  (*주임 신부: 주교가 한 성당의 관할구역 책임자로 임명한 사제)


  비안네 신부는 분명 큰 추앙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한 어떠한 화려함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한 사람이 유명해지면 동네를 난개발 하고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려고 하잖아요. 여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크고 높은 성당을 짓지도 않았고 비안네 신부가 살았던 동네를 관광지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순례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제들의 소감은 한결같았습니다. 비안네 신부가 일했던 성당과 그가 살았던 집에서 따뜻함을 느꼈다고 했죠. 평생 가난하고 소박했던 모습을 따라 작지만 기품 있는 모습으로 지은 성당, 사제들의 비빌언덕과 같은 아르스 대성전 Basilique d'Ars입니다.


아르스 대성전


바보 소년이 신부가 되기까지

  먼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삶을 잠깐 들여다보겠습니다. 삶이 아주 기구합니다. 비안네는 1786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프랑스혁명을 체험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사제들이 혁명군에 잡혀서 살해당하는 걸 익숙하게 지켜봐야 했습니다. 어려움 속에 영웅이 태어난다고 하던가요? 어린 비안네의 눈에서 사제들은 영웅이었습니다. 혁명가들의 눈을 피해서 사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멋져 보였습니다.


  이때 비안네는 사제가 되고자 결심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안에서 사제들의 활동은 큰 희망이었고 자신도 그 희망의 불씨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마침내 1813년 비안네는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그리 똑똑한 편이 아니라서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를 꽤 어려워했습니다. 당시 사제 양성 기관인 신학교에서는 라틴어로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비안네는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학업 미달자로 판단되어 신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낙제된 것이죠. 그러나 비안네 곁에는 발레 Balley 신부가 있었습니다. 


아르스에 뜬 무지개


  발레는 비안네의 귀인이었습니다. 그는 비안네의 인품과 신앙을 학식보다 높게 평가했고 교구 최고 책임자인 주교에게 사제가 될 기회를 다시 줘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동시에 직접 공부도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진심은 통했습니다. 주교는 비안네에게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사제 자질에 관한 평가를 받게 했고 1815년 여름,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작은 마을 아르스

  비안네 신부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리옹에서 손 강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아르스 Ars에 부임했을 때부터입니다. 아르스는 그의 두 번째 부임지였습니다. 아르스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고 사람들은 아주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술독에 빠져 있다가 밤에는 유흥으로 향락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성당엔 발길 하나 향하지 않았겠죠.


비안네 신부의 방


  비안네 신부는 절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쓰러져가던 아르스 성당을 고쳐 짓고 사제로서 의무를 이어나갔습니다. 특히 스스로 희생 행위를 통해 신자들이 다시 회개하고 성당으로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참고로 가톨릭교회에서 희생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공덕을 베풀 수 있는 실천 중에 하나입니다. 이를 위해 비안네 신부는 자주 단식하고, 식사를 하더라도 감자와 빵으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은 딱딱한 합판에 누워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뿐인가요? 기도 생활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열 시간 가까이 자신과 공동체, 마을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는 신부이지만 성당 안에만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잘못된 행위는 꾸짖고 성당에 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고 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요? 마을 사람들은 비안네 신부의 한결같은 모습에 점차적으로 감화되었고 수년간의 노력 끝에 매주 일요일이면 성당에 마을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었습니다.


기워 입던 비안네 신부의 수단과 제의


고해성사로 유명해진 비안네 신부

  고해성사라고 들어보셨죠? 가톨릭교회에선 사람들이 지은 죄를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받게끔 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작은 골방 같은 데에서 신부님과 칸막이를 맞대고 죄를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제는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도록 충고해 주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기도문을 읊습니다. 마지막으로 죄에 대한 보속으로 자선 행위, 기도와 같이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라고 권고하죠. 아르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을 등지고 살았던 삶을 점차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러 성당으로 차츰차츰 찾아왔습니다. 비안네 신부도 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느 때 상관없이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신자들이 솔직한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께 죄를 고백한다지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고백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고해성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  아무리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백하더라도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스스로 죄를 반성하는 마음, 이걸 양심 성찰이 필요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지만 고해성사라는 존재의 이유를 무시할 순 더 없었겠죠. 그래서 일부 신자에게는 죄를 용서한다는 기도문(사죄경)을 읊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더욱더 양심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했습니다.



  비안네 신부가 고해성사를 성심성의껏 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리옹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이 작은 마을 아르스로 몰려왔습니다. 매일 수십 명이, 한 해에 약 2만 명이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고해성사를 줬습니다. 무려 18시간 동안요! 잠을 자는  시간 딱 4시간 빼고는 매일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준 겁니다. 아르스는 고해성사를 하러 온 신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아르스 성당은 양심을 성찰하고 기도하는 신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세속으로 물들어졌던 이 동네와 성당이, 가장 거룩한 장소로 바뀐 것입니다.



계속되는 화해의 기적

  비안네 신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가장 큰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자신이 머물렀던 성당을 확장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성당 규모로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고해성사를 밤낮으로 기다리는 신자들을 길거리에 마냥 둘 수 없었겠지요. 비안네 신부는 신자들을 너무 아꼈거든요! 


기존의 성당과 증축한 성당

  그래서 비안네 신부는 당시 성당 건축을 전문으로 하던 피에르 보산 Pierre-Marie Bossan이라는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하필 왜 ‘그’였는지 보산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들려드리겠습니다. 보산은 종교 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유명한 건축가였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권위와 둘레 안에서 살지 않고 자신의 양심대로 자유롭게 사는 ‘자유사상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그는 종교 건축을 통해 한없이 돈을 벌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보산에게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과 함께 여행을 하던 중 형이 죽은 겁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삶이 무엇인지 깊은 고민에 빠지며 자신이 하던 일을 잠시 놓게 됩니다. 보산도 그랬습니다. 모든 부와 명예를 손에서 놓고 1852년 여동생과 함께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를 만나러 갔습니다. 보산은 이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을 되찾았고 진정한 종교 건축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비안네 신부가 보산에게 성당 증축을 맡긴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건축 실력은 당연히 증명되어 있었고 이젠 신앙과 화해까지 했으니 딱 자격이 되고도 남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는 과로와 폭염으로 지쳐있는 가운데 1859년 일흔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사 기공도 못 보고 완공도 못 본 것입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공간

  증축 공사는 1862년에 시작해서 1910년에 마쳤습니다. 보산은 비안네 신부를 극진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흔적을 전혀 지우지 않고 기존의 성당을 보존했습니다. 성당의 제단 뒷 벽만 딱 철거해서 큰 공간을 확장시킨 것입니다. 보통 기존의 성당을 다 철거하고 크고 웅장한 성당을 짓던 모습과는 꽤나 달랐습니다. 덕분에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성당 입구에서 비안네 신부가 사용했던 제단, 강론대, 개인 기도 공간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를 현대까지 연결시키고 또 미래로 향하게끔 만든 아주 독특한 구조인 것입니다. 이 작고도 아름다운 성당은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대성전 Basilique으로 지정되기까지 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도 이 성당에 잠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안네 신부의 죽음 이후 그를 밀랍 처리를 해서 성당 안에 안치시켰습니다. 언제나 신자들을 회개시키고 천국의 문으로 데려다주고 싶었던 비안네 신부의 사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 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비안네 신부를 보기 위해 아르스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방문자들은 단순히 종교 유적지로 치부되어서 구경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가난하게 살았던 비안네 신부의 삶을 살펴보고 또 화해의 기적이 일어났던 아르스 성당을 둘러보면서 자기의 삶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순수한 마음이 하늘에 닿기까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와 관련된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818년 2월 9일, 마흔한 살의 젊은 비안네 신부가 아르스 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되었을 때 일입니다. 비안네는 먼 길을 직접 걸어서 아르스로 향했습니다.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가고 있을 때 기상 조건까지 안 좋았던지라 그는 아르스 부근에서 자신이 가야 할 성당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양치기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소년의 이름은 앙투안 지브르 Antoine Givre였습니다. 


아르스 마을 바깥 언덕에 세워진 두 사람의 만남 청동상


  비안네는 소년에게 성당이 어디 있는지 길을 안내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앙투안은 누군지도 모르는 신부에게 성당이 있는 곳을 친절히 알려줬고 비안네는 무척이나 만족해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네가 나에게 아르스 가는 길을 알려줬으니, 나는 너에게 천국 가는 길을 알려줄게! 

Tu m’as montré le chemin d’Ars, Je te montrerai le chemin du Ciel! 



  이후 앙투안의 삶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앙투안은 비안네 신부가 세상을 떠난 딱 5일 뒤, 1859년 8월 9일에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어쩌면 비안네 신부님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앙투안을 잊지 않고 천국으로 안내하는 것뿐만 아니라 손을 꼭 잡고 데려주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 겸손한 한 사제의 모습은 아르스에 그대로 남아 전 세계 사제들의 모범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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