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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Mar 22. 2024

해외살이 유튜버 상 받은 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만약 프랑스에서 유튜브를 꾸준히 관리했다면 곽튜브나 빠니보틀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유튜브가 시작했을 때부터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고, 텔레비전이 사양되어 소셜미디어로 플랫폼이 옮겨질 거라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나는 어딜 가든 사진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한 컷에 더 많은 정보와 움직임이 있으면 그 순간을 기억하기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 영상을 제작한 건 중학생 때였다. 내가 다니던 성당에 마침 영상부가 있었고 성당 곳곳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찍었다. 그때는 8mm 테이프를 벽돌만 한 소니 캠코더에 넣어 촬영했다. 다행히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이 대중화되던 시기라서 아날로그 테이프를 디지털 영상 파일로 변환해서 편집했다. 그때 배운 기술을 대학교에 올라와서 동아리 활동에 기록을 남기는 데 사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라는 웹 사이트가 생겼다. 처음에는 별것도 아닌 영상이 아주 가끔씩 올라오는 걸 보고 어떤 이유로 저런 플랫폼이 생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내가 만든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서 다른 사람들이 보게끔 하는 정도로 이용만 했다. 채널 이름은 '그레곰 TV'. 그 시절 대학교 친구들이 날 부르던 별명이었다. 내 세례명인 그레고리오와 곰을 합쳐서 그레곰이 된 것이다.


https://youtu.be/kjY0Jqhkve0


방송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뉴미디어 플랫폼을 연구하는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당시에 핫했던 소셜미디어를 파헤치고 또 활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오랜 시간 경험 끝에 내린 결론은 바로 텔레비전이 몇 년 안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리고 유튜브나 네이버 같이 일상에서 종종 사용하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영상 매체가 옮겨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중견급 이상 PD 선배들은 이 말을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따라오지 못했나 보다.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각종 보고서를 쓰라고 주문을 했으니 말이다. 


유튜브는 이런 나의 연구를 뒷받침해주는 실험도구였다. 그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지만 취미생활이나 행사 같이 UCC처럼 구성한 짧은 영상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휴가를 갈 때마다 고프로를 사서 브이로그를 만들기 시작했고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아직 유럽에서는 영상을 누구나 찍을 수 있다는 풍조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작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모습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나는 연예인처럼 내 얼굴을 들이밀며 꾸준히 영상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소위 미남, 미녀라고 불리는 얼짱들만 영상과 사진에 등장했기에 나는 그 자격조차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튜브는 내가 만든 영상을 저장하는 아카이브로 여기며 방송국과 여러 단체에서 영상 수주를 받아 내 본업에 충실하기만 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면서 유튜브를 살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심심했다. 공부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유튜브가 일상화되었지만 유학생활과 관련해서 올라오는 영상은 없었다. 나는 이 점을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사는지 영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바게트는 정말 맛있는지, 프랑스 크로와상은 얼마나 맛있는지 등 구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이었다. 또 방학 때마다 여행했던 짧은 영상들, 한글학교에서 교사 알바를 하면서 찍은 영상들을 올렸다.


https://youtu.be/YArjVZHV0pM


사람들은 이런 내 영상에 관심이 많았다. 단박에 수천 명, 수만 명이 시청하더니 어느 순간 수십 만 명이 시청하고 말았다. 한류가 이제 막 유럽에 도착해서 퍼지고 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내 영상이 얻어걸린 게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내가 한글을 가르치는 영상을 보고 어떤 프랑스 신문에 기사까지 났다. 남프랑스에 떠오르는 한국 문화라는 제목으로 저 멀리 파리에서도 남쪽까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내려간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프랑스 한인회에서 프랑스 생활을 담은 UCC 콩쿠르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프랑스에 사는 한인들이 약 만명도 되지 않고 이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영상을 제작해서 공모를 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주에서도 대부분 교환학생이 많으니까 특별한 이야기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이 땅에 살아온 젊은 한인들 중심으로 영상이 만들어질 게 뻔했다. 생각해 보니 승산 있는 콩쿠르였다. 이윽고 나는 그동안 찍어놓은 영상 소스를 찾아서 새로운 걸 만들기 시작했고 부족한 장면은 바로 거리에 나가 촬영도 했다. 


https://youtu.be/l9tvUUml_nE


지난 몇 년간 내가 프랑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인으로서 어떤 자긍심을 갖고 살았는지 등에 관련한 영상을 만들었다. 너무 국뽕이 아니겠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주최자가 프랑스 한인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제작 방향성은 당연한 거였다. 나는 2주간 정성 들여 영상을 제작했고, 프랑스 특유의 분위기를 표현한 색감 작업까지 해서 공모에 응했다. 


그렇게 나는 2등에 해당하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 달 치 식비에 해당하는 상금도 받았다. 파리의 한 구청에서 다 같이 상영회를 했을 때도 내 영상은 호응이 좋았다. 아무래도 방송국에서 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한인회 UCC 콩쿠르 시상식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1등 할 거라고 생각했다. 공모에 응했던 대부분의 영상이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지 않았고 스토리도 탄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2등 한 이유는 한인회의 고질적인 봐주기 수법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프랑스 한인회는 이 UCC 콩쿠르를 개최하면서 큰 호응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인회 임원의 자녀, 친구, 그들이 다니고 있는 한인 개신교회 청년회(한인회 임원들은 모두 그 한인교회 신도들이었다)를 중심으로 콩쿠르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너 한번 영상 공모해 봐~ 상 하나 줄게" 이런 식이었다. 거기에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 퀄리티 있는 영상을 선보였으니 한인회에서 얼마나 놀랐을까.


내가 받은 최우수상은 급조된 상이었다. 원래 대상 다음은 우수상이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고퀄리티인 내 영상을 떨어트리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을 거다. 시상식 당일, 공교롭게도 한인회 자녀들이 앉아있던 곳 바로 뒤에 내가 자리하게 되었고 그 어린 친구들이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미 시상 내역이 점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왜 저 사람이 상을 받냐는 투정이었다. 저 사람은 곧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https://youtu.be/KSwty7h8Zuo?si=_6CD8qoaT7w0fmX9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는 이것을 계기로 유튜브를 더 살려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으로 내 얼굴도 드러내며 브이로그 같은 브이로그를 만들고 있다. 지나간 시간을 되짚으며 '그랬었더라면..' 하고 말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선택을 하는 게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만약 내가 유튜브에 영상을 더 많이 올리고 매진했더라면 곽튜브, 빠니보틀보다 더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뭐, 개꿈 같은 소리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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