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모든 것이 부모 탓이라는 잔인한 결정론

거장들이 남긴 그림자.

by 테라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의 어깨 위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짐이 하나씩 얹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 짐을 ‘과거’라 부르고, 어떤 이는 ‘상처’라 부르지만, 그 무게의 실체를 파고들면 결국 하나의

문장에 가닿습니다.


“나의 지금 이 불행은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내가 내 아이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리학의 대가들은 지난 100년 동안 우리에게 결정론이라는 잔인한 안경을 씌워주었습니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되어 수많은 발달 심리학자로 이어진 이 관점은, 한 인간의 성격과 운명이 영유아기의

양육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이 명쾌한 인과관계는 대중 심리학의 탈을 쓰고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마주할 때 현재의 삶을 돌보기보다, 수십 년 전 부모가 내게 줬던 결핍의 증거를 찾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습니다.


물론 발달 심리학과 애착 이론이 인류에게 남긴 거대한 성취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위대한 이론들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영유아기 환경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아동을 존중하며 키워야 한다는 과학적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아동 인권과 교육에 있어 눈부신 진보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론들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부모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기형적인 결정론으로 변질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를 더 잘 이해하라고 쥐여준 심리학적 지식이, 오히려 부모가 아이와 눈을 맞출 수 있는 평온한 ‘오늘’을 빼앗아 가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30년 가까이 교육 현장과 상담실을 지키며, 이 부모 결정론이 한 인간의 생명력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똑똑히 목격해 왔습니다. 대가들이 정립한 이론은 부모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자녀에게는 변하지 않는 운명이라는 절망을 선물했습니다.


상담실에서 만난 한 40대 여성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녀는 이직을 수없이 반복하며 업무능력에도, 직장 내 인간관계에도 서툰 자신을 책망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 어머니가 저를 충분히 안아주지 않았대요. 불안정 애착이죠. 제 안의 내면 아이가 아직도 울고 있어서

저는 평생 온전한 행복을 느낄 수 없나 봐요.”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그 처절한 노력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오늘을 '애착 실패'라는

낙인 속에 가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시절 겪었을 삶의 고단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먹이고 입혔던 그 숭고한 헌신은 불안정 애착이라는 차가운 학술 용어 아래 실종되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범인을 찾는 수사가 아니라 오늘 자신이 일구어낸 삶에 대한 긍정이었지만, 결정론적 심리학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과거의 늪을 파헤치라고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들에게는 더 가혹합니다. “아이의 뇌는 3세 이전에 완성된다”, “결정적 시기를 놓치면 회복할 수 없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은 부모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넣습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아이와 10분만 덜 놀아줘도 정서 발달에 문제가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게 만듭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 거창한 이론들이 당신이 오늘 아침 아이를 위해 정성껏 끓인 국 한 그릇의 온기를 알기나 할까요?


대가들은 데이터와 통계로 부모의 실수를 분석하지만, 그 실수 뒤에 숨겨진 부모의 눈물겨운 애씀과 사랑은 보지 못합니다. 아이의 부족함을 양육의 실패로 규정짓는 순간, 그 아이가 오늘 보여준 작은 변화와 스스로

성장하려는 생명력은 이론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고 맙니다.


서구의 심리학이 한국 사회에 들어오며 발생한 가장 큰 폐단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모 탓’의 문화입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녀에게 헌신적이지만, 역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죄책감을 느끼며 삽니다. 유교적 책임감과 서구적 결정론이 결합하여, 부모의 작은 실수가 자녀의 인생 전체를 망친다는 기괴한 공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대가들은 한국의 ‘정(情)’이 가진 치유의 힘을 모릅니다.


부족한 양육 속에서도 할머니의 품, 이웃의 다정함, 그리고 아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회복 탄력성’이 이론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상담자들에게도 부모 결정론은 참으로 편리한 도구입니다. 복잡한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는 대신, 모든 원인을 부모에게 돌리면 상담은 아주 명쾌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난도질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과거의 상처를 파헤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자신의 대견함을 발견할 때 시작됩니다.


심리학과 상담의 진정한 쓸모는 과거의 인과관계를 밝혀내어 범인을 지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상담은 과거라는 진흙탕 속에서도 기어이 피어난 내담자의 생명력을 찾아내고, 그것을 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하는 작업입니다. 이론은 그 과정에서 내담자의 마음을 섬세하게 살피기 위한 참고서일 뿐, 한 사람의 인생을 규정짓는 판결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잔인한 결정론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은 3세 이전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부모가 완벽하지 않았을지언정, 그것이 당신의 오늘을 영원히 망칠 권리는 없습니다.


인간은 과거의 결과물이 아니라, 현재를 선택하고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실수를 분석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엔, 당신 앞에 놓인 오늘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 내 결핍의 탓을 찾기 위해 부모의 뒤로 숨어버리지는 않으시길 마음을 담아 바랍니다. -


심리학은 우리에게 과거를 분석할 도구는 주었을지 모르지만,

오늘을 살아낼 용기는 주지 못하기도 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은 명쾌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무책임한 진단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현재의 생명력’과 ‘선택의 의지’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대가들은 당신의 과거를 파헤칠 순 있어도,

당신이 오늘 내딛는 용기 있는 한 걸음의 가치는 절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부모의 실패작이 아니며, 당신의 아이 또한 당신의 양육 성적표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르는 당신만의 오늘, 그 생생한 삶의 주권을 이제 당신의 손으로 되찾아오길 바랍니다.


당신은 오늘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