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막걸리에 술술 날려 보내고

기나긴 후회와 핑계에 대한 후회

by 정그루


아, 여기 가게 이름 값하네요. 국물 따로 안 뜨고 국수만 먹었는데도 너무 맛있네. 네? 아파 보여요? 아니에요. 엄청 건강한데. (살은…. 빠졌을 리가 없는데.) 좀 슬퍼 보인다고요? 남편이랑 싸웠는데 아직 화해 안 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아 맞아요. 엄마가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니에요. 처음 들었을 때가 좀 힘들었고, 지금은 괜찮아요.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말씀하시는데요 뭐. 저도 밖에 나와 있는 게 차라리 나아요.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데요!


여기 파전도 잘하네요.


지척에 사는데도 엄마랑 자주 만나진 않았거든요. 자주 만나면 선이 흐려지고 그러면 서운하고 상처받는 일이 생겨서요. 엄마가 몇 주간 사우나에 못 간 것도 나중에 들었어요. 평상시랑 다름없이 지내는데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가셨다고요. 결과가 아직 안 나왔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엄마는 그 몸으로 김장을 하셨어요. 평소보다 배추량이 많이 적다고 혼자서 다 무치는 통에 저는 옆에서 허드렛일만 했어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강해요, 저랑은 다르게.


알 만큼 알 나이인 30대 중반이 되도록, 엄마한테 내 후회를 전할 때가 많았어요. 내 선택을 되돌리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할 시간은 차고 넘쳤는데, 누군가에게 후회와 은근한 원망을 전하는 편이 훨씬 쉬웠기 때문이에요.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분명 다른 길을 가려고 했는데, 왜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지겹게도 말했어요. 엄마는, 아니라고, 그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난 좋은 일이 있을 땐 그 말이 맞다고 믿었고, 힘든 일이 있을 땐 그 말에 반발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TV에도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고충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최근에서야 그루가 다른 걸 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다른 걸 해야 하나, 말하기 시작했어요.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면서도, 난 여전히 핑계를 댔어요. 난 이제 결혼을 해서 다른 길은 가기 좀 어려워... 예전에 했어야 했는데...


몇 주 전 엄마를 만났는데, 엄마가 그러시데요. 내가 후회되는 게 참 많다…. 우리 똑똑한 그루 엄마가 다른 것 하게 할걸. 그때야 조금 정신 차린 것 같아요.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거지. 눈물을 간신히 참으면서 엄마한테 말했어요. 엄마, 인생도 짧은데, 우리 인제 그만 후회해요. 재밌게 살아요, 우리. 그러면서 제 마음의 번뇌도 같이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어요.



병원에 모셔다 드린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고 지하철로 병원에 가시는 우리 엄마. 나보다도 더 씩씩한 우리 엄마. 몸 안에 혹시 어떤 녀석이 또 기다리고 있든, 엄마는 평소처럼 당당하고 씩씩하게 잘 이겨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시도 때도 없이 무너질 것 같은 이 마음을 이제는 조금 숨기려고 해요. 괜찮아, 별것 아니야,라는 말은 엄마가 아니라 내가 해 드려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더 후회하기 전에 엄마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요. 너무 다른 모녀이지만,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확실할 테니까요.


우리에게 우곡 생주는 너무 묵직하고 텁텁했다.

막걸리를 홀짝거리면서 담담하게 말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또 눈이 축축해졌다. 내 앞에 같이 있던 분이 나보다 먼저 휴지를 가져가 눈에 갖다 대고 있다. 덕분에 평소엔 다른 사람 앞에서 도통 울지 않는 나도 멋쩍어하지 않고 휴지를 실컷 뽑는다. 2026년, 새해가 다가왔다. 새해에는, 후회할 짓은 제발 그만해야지. 후회하지 않게 잘해 드리고, 후회할 것 같으면 차라리 새로운 도전을 해야지. 즐겁게 살아야지. 후회만 지겹게 오래 하고 산 세월을 더 이상 늘리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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