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툭한 소개팅의 추억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해 보기 전에는, 막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길 꿈꾸면서, 사랑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너는 짝사랑할 사람이라도 있어서 좋겠다, 그래도 좋아하니까 만나는 거잖아, 따위의 말을 함부로 하곤 했어요. 그리고서 제가 정말 누구를 짝사랑하게 되고 그 말을 많이 후회했더랬죠. 소개팅도 마찬가지였어요. 누구랑 소개팅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게 누구였더라, 하는 말을 들을 때 속으로 ‘그걸 어떻게 까먹지? 나도 그럴 정도로 소개팅해 보기나 하면 소원이 없겠네’ 했는데, 제가 그러고 있더라니까요. 저는 그게 혹시나 자랑인데 내가 못 알아들은 건가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지겨움의 정서가 짙은 것 같아요.
솔직히 저는 소개팅을 많이 한 축도 아니긴 한데,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손에 못 꼽기는 해요. 근데 언니들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진짜 알겠더라고요. 나중엔 기대도 안 생겨요. 그런데 아예 만남을 거부하자니 두려워요. 왠지 그런 것 있잖아요. 내가 안 나가기로 한 그 소개팅에서 알고 보니 내 운명의 상대를 만났을 수도 있었다든지, 알고 보니 진짜 진국인 사람이 나온다든지, 알고 보니 진짜 잘 맞든지 할 수도 있잖아요(주의: 혼자 노는 세월이 길면 나와 꼭 맞는 솔메이트가 어딘가 있을 것 같은 환상이 안 깨져 만남이 순탄치 않을 수 있음). 그러니까 안 나갔다가 운명의 상대를 놓칠 것 같다는 걱정에 결국 약속을 잡고 나가게 되는데, 나가면 어떤 형태로든 실망을 한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장소라도 왔다 갔다 하기 덜 불편한 데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구경할 것이 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을 했던 것이에요.
퇴근할 때 편하려고 합정에서 몇 번 소개팅했던 적이 있는데, 그중에서 뭔가 중간 정도로 어색하고 설레는 만남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둘 다 출퇴근을 차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 또 주차가 잘 되는 데서 만났죠. 제가 위에 이미 썼는데 기억하세요? 맞아요, 합정 딜라이트 스퀘어에서 만났어요. 마늘에 미친 집에서 내가 마늘을 먹는 건지 파스타를 먹는 건지 모르겠다는 기분이지만 맛은 음미하면서, 한껏 먹었어요. 이야기를 마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카페에 가서 차 한잔하고 금방 헤어졌죠. 아, 이건 오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여러분도 딱 느끼신 적 있죠? 딱 그런 만남이었고 우린 이르게 헤어져서 저는 신나게 집으로 향했어요. 근데 전화가 오더라고요. 구 직장동료이자 동갑인 친구가 알고 보니 마늘에 미친 집에서 저를 봤더라고요. 민망했어요.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더라고요. 구 직장동료 모임을 거기서 해서 단체로 제가 어색한 미소로 소개팅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셨다고 해요. 안 입던 원피스도 입었는데 참 민망하더라고요.
역시 만남은 연남동이지, 싶어서 홍대입구역 3번 출구에서도 만났네요(다들 잘 지내시기를). 할 말이 없고 빨리 헤어지고 싶어서 얼른 밥을 먹고 차를 테이크 아웃해서 연트럴 파크를 한 바퀴 풀로 돌고 빠르게 헤어졌던 기억이 인상적이에요(문득 우울한 기분이 들어 홍대 옷거리에서 옷을 신나게 샀네요). 어딜 갈지 정해오지 않아서 여기저기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돼지고기가 들어간 로제 파스타가 너무 맛있던 만남도 있었고, 왠지 설렜고 헤어질 때도 애틋한 느낌을 주시더니 아무 연락하지 않던 만남도 있었어요. 아, 연트럴 파크에서 모기 뷔페의 희생양이 되어서 다리를 벅벅 긁던 미안한 만남도 떠오르네요(지나고 나니까 이분, 괜찮은 분이었던 것 같아요).
많은 모임을 다소 짧게, 희화화해서 쓴 경향이 있지만, 저도 누군가에겐 한 줄짜리 형편없는 기억으로 살고 있을 테니 너무 미워하진 말아 주세요. 마음에 드는 사람들 앞에선 삐걱거리거나, 안 삐걱거려도 연락이 안 왔던 안 좋은 기억들 때문에 시니컬해진 것으로 생각해 주세요.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여러 기억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회가 있을 때 소개팅에 나가본 것은 잘한 것 같아요. 직접 연애해 보는 것만큼은 확실히 경험이 되진 않았지만, 마음이 서로 맞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았거든요. 좀 지치기도 했고. 마음이 맞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너무도 소중했어요. 하지만 결국, 모든 게 맞는 사람은 없으며(때로는 나 자신과도 잘 안 맞음), 부딪치고 경험하고 맞춰나가는 게 관계라는 상투적인(하지만 100% 공감하는) 결론으로 마무리해 봅니다.
202x. 어느 과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