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농담 한 마디로, 개인의 삶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는가
대학시절 한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어 간단히 엽서에 적었던 '농담'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습니다. 밀란 쿤데라의『농담』은 가벼운 마음으로 건넨 농담 한마디 때문에 순조로웠던 인생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한 남자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입니다. 어떤 문학적 상징이나 역사적 관점이 아닌 루드바크라는 개인의 인생이 역사적 흐름에서 농담처럼 흘러가는 과정을 더듬어봅니다.
충실하고 진지한 공산당원인 마르게타(시대 정신과 놀랍도록 일치하는)를 놀리기 위해 루드비크가 보낸 간단한 엽서가 반공산주의적인 증거가 되어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심심풀이로 작성된 농담이 공산주의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습니다. 평소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행동과 미소가 지식인이라는 냄새를 풍긴다는 동료들의 막연하던 판단은 심각한 확신이 되고, 동지들이 내린 집단적 결정에 의해 루드비크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히며 공산당에서 추출됩니다.
내 농담들에는 진지함이 너무 결여되어 있었는데 당시의 기쁨은 해학이나 아니러니를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미소 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루드비크는 엽서의 세 문장을 심문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설사 장난으로 썼다 해서 자신의 엽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길들게 되었고 머릿속에서 자아비판 검토를 하며, 결국엔 일련의 사건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공산주의가 팽창하던 시기, 전체주의 사회에서 사소한 농담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파장으로 루드비크는 자신의 생활 근거지에서 추출당하며 생소한 공간에서 선택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학업을 계속할 권리조차 잃고 낯설고 추운 오스트라바 근교의 병영에서 도로보수 작업을 하거나 통조림 공장에서 계절 노동에 동원됩니다. 낯선 곳에서 맞는 일상과 사랑, 그렇게 보낸 시간들 안에서 느끼는 갈등과 후회들이 몽땅 인생으로 채워집니다. 친구와 가족, 동료들 모두와 멀어지며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꾸 '불순함'이 주위를 감쌉니다. 집단의 편협한 사고와 시각으로 재단되고 평가받는 인생, 조그만 여지의 자유의지조차 망가져갑니다. 인생이 점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검은 표지' 낙인이 찍힌 루드비크,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시간이 멈춘 듯 지냅니다. 자신이 한 농담 한마디로 인해 벌어진 모든 상황을 되돌릴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하게 변해가는 삶에 대해 절망합니다. 오직 복수와 증오 속에 뒤틀린 감정으로 지내던 루드비크는 우연히 루치에를 만나게 되지만 루치에와의 사랑도 비극으로 끝납니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던 고민의 끝에서 - 모두가 어떤 적당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과 집단은 언제나 누구든 몰아낼 수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 깨닫습니다.
강당에 모여 있던 집단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세상 모든 집단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몰아낼 수 있다.
루드비크는 공산당에서 추출되고 15년이 지난 후 고향 모라비아에서 동료들과 재회합니다. 15년간 별러온 제마네크를 향한 복수는 싱거운 해프닝으로 끝이 나고 15년간 내편이었던 친구를 잃는 비극을 마주합니다.
증오의 대상 제마네크를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
이념에 대한 확신은 개인의 삶을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렇기에 사소한 농담이 금지어 앞에 용납되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루드비크의 삶을 유린합니다. 경직된 이념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은 루드비크의 삶은 오로지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는 이념의 폭력성을 견디는 것뿐이었기에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우리 운명은 죽음보다 훨씬 이전에 끝나는 일도 종종 있다는 것과 종말의 순간이 반드시 죽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쓸데없는 지난 며칠간을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의 모든 역겨운 난리 법석들을 겪은 루드비크의 지루하고 고독한 삶의 과정은 결국 농담처럼, 해프닝으로 인식되는 놀라운 순간을 맞습니다.
국가(혹은 정치 집단)의 강력한 정치적 신념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하게 깊숙이 관여를 하고 있는지 굉장히 잘 드러내준 소설입니다. 한 때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사람과 사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루드비크는 스스로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환상 속에서 결국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곤 역사 속에 가려졌던 소박하고 가난한, 일상이라는 초원의 삶을 깨닫습니다. 집단주의의 편협함이 어떤 모습으로 개인의 의사나 가치와 신념을 묵살하고 유의미한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과거에 몰입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지 - 그것은 우리 한국사가 이데올로기와 정쟁으로 얼룩진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결국, 자유로운 의식의 성장과 사회의 성장이 함께 하지 않는 한 개인의 발버둥과 자유는 더 긴 시간 동안 한낱 허황된 농담으로 소비되는 과정만 반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궁극적 농담이란,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모든 것들이 거대한 '망각'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개인적이고 절대적인 모든 것이 거대한 망각 속으로 흘러가면, 바로 우리 생은 가장 '비극적 농담'에 이르는 순간을 맞습니다. 역사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속에 놓인 루드비크가 망각 속에서 자신의 자유와 삶을 건져 올릴 방법은 무엇일까요?
밀란 쿤데라는 작품을 통해 오직 단 한번뿐인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광범위한 역사와 시대를 초월한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각성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