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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첫날, 선물같은 하루

by 정혜영


오늘 하루가 별로여도 괜찮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힘들었던 날도, 무의미해 보였던 날도 모두 나를 만들어온 소중한 시간이었거든요.
_ <기록이라는 세계>, 리니


새벽 6시면 온라인 필사방에 어김없이 올라오는 오늘의 문장. '오늘 하루가 모두 나를 만들어온 소중한 시간'이란 문구에 눈이 번쩍 뜨인다. 방학인 데다 명절 연휴로 느슨해진 마음에 늦은 밤까지 해찰하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내게 오늘의 문장이 회초리를 들었나. 너, 입에 달고 있는 말 있지. 오늘의 너는 매일 하루하루가 쌓인 결괏값이라며? 지금 내 하루는 어떤 결괏값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걸까.


최근 2년간의 방학엔 뭔가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22년 겨울방학 땐 <어린이의 문장>을 쓰느라 바빴고, 23년 여름방학 전후로는 9인의 저자가 함께 쓴 책, <지금 당신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작업을 했으며, 23년 겨울방학 때는 <어쩌면 다정한 학교>에 들어갈 글들로 생각을 쥐어짜며 시간을 보냈다.

전업 작가가 아닌 평범한 내게 책이 되는 글쓰기는 늘 내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지만, 살아온 세월 속에서 절로 찾아오는 운이라곤 1도 없던 내게 생의 방향을 짚어주는 빅픽처를 만난 양 감사하고 행복했다.


행운처럼 찾아온 출간의 기회에 꿈같은 시간을 바쁘게 보내다 보니 이번처럼 여유로운 방학은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하기까지 다. 출간을 목표로 한 글쓰기 일정이 없으니 일주일 간의 오카리나 출석 연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방학을 이렇게 큰 계획 없이 맞이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간 글을 쓰고 책을 냈었는지 정말 꿈만 같다. 글을 쓸 때마다 여전히 시험대에 오르는 내 필력을 마주하면 더더욱.


2월의 첫날. 지인과 북한산에 올랐다. 내 주기적인 북한산행을 아는 지인들에게서 "언제 한번 함께 가자"는 얘기는 숱하게 들었다. 정작 실행되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늘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 정말 그 행위를 하려는 이는 '언제'라는 모호한 말로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결정에 맡기지 않는다. 바로 실행할 뿐이다.

이제 누군가 함께 산에 가고 싶다고 말하면 그저 웃는다. '전 늘 오르니 그냥 그대만 오시면 됩니다' 속으로 말하며.

이날 함께한 지인이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의지를 생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바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


전날 밤, 소담스레 내리는 눈을 보며 두 가지 마음이 엉켰다. 눈 참 예쁘게 내리네. vs 내일 입산 통제되면 어쩌나. 아름다운 것을 온전히 즐기는 대상은 세 부류일 거다. 아주 어린아이이거나 아주 노인이거나 강아지 거나.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도 강아지가 될 수도 없으니 노년으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에 감사할 일 추가다.


3년 넘게 다녔어도 눈 온 뒤의 북한산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날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국립공원 설산 산행은 등산객의 의지만으로 허락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것이 허락되었다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 온전히 누릴 것.


멀리서 오느라 늘 아침을 거르고 오는 지인을 위해 냉동실에서 미리 꺼내놓은 팥찹쌀떡이 제대로 말랑말랑해졌다. PT를 받으며 몸관리를 하는 그녀가 이 탄수화물 덩어리를 좋아할까? 집에 상비해 두는 프로틴 음료를 떡과 함께 담았다. 이거랑 함께라면 드실 지도 모르니.


아침 일찍 산행에 나설 땐 그 시간에 유일하게 문을 연 집 근처 제빵점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서 마시며 가곤 했는데, 시간을 체크해 보니 촉박하다. 빠른 속도로 사 갈 것인가, 오늘은 넘겨야 할 것인가... 순간의 고민에 빠졌는데,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알람을 누르고 잠깐만 더 눈을 붙인다는 게 늦잠을 자버렸다고. 약속 시간보다 40여분 늦을 예정이니 천천히 나오시라고.

오, 내 아메리카노의 여유 시간을 이렇게 확보해 주시다니! 덕분에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차 안에서 느긋하게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초입부터 든든한 발이 되어준 아이젠이 아니었다면 설산을 안전하게 누릴 수 있었을까. 눈길이라 평소보다 1.5배는 더 힘이 들었지만 명절 연휴 동안 긴장 풀린 몸에 제대로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황홀한 설산에, 아침에 늦어 미안하다며 지인이 쏜 맛있는 점심까지. 2월 첫날이 선물 같은 것들로 채워졌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시간 속에선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살핀다. 각자의 삶에 바빠 이제 한자리에서 밥 먹는 날을 손에 꼽는 한 지붕 내 우리 가족, 소식 궁금했던 친구들, 늘 두 딸들과 만의 시간을 소망하시는 친정 엄마, 그리고 미루었던 내 건강 검진까지.


소중한 것들을 헤아리는 오늘 하루가 모여 어느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 갈 테지. 매일 쌓이는 내 하루가 만드는 어떤 우주가 생길 테지. 그건 어떤 모습일까?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

썩 멋지지 않아도 좋다.

오늘 하루가 내 마음에 들었다면.


오늘이 차곡차곡 쌓이면 어떤 우주가 만들어질까요?(캘리, 그림 by 정혜영/ 캘리 문구 출처: 지혜로운 숲 혜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캘리, 그림 by 정혜영/ 캘리 문구 출처: 지혜로운 숲 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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