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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크와 콩나무> 이야기는 어떻게 바뀌었나?

by 정혜영

* 이 매거진에 쓰인 모든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임을 밝혀둡니다.


초등 2학년 국어 교과 2단원은 말놀이를 통해 말의 재미를 느끼는 학습 내용이다. 끝말잇기, 말 덧붙이기, 다섯 글자 말놀이 등 말을 활용한 즐거운 말놀이를 맛본 후, 특정 낱말을 활용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시간이다. 수업을 할 때마다 아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너무 새롭고 재밌어서 2학년 담임이었던 2년 전에도 그 수업을 한 후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번엔 얼핏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낱말로 누군가 첫 문장을 만들면 다음 사람이 그 문장에 어울리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말놀이를 했다.

전 시간에 아이들이 채소와 장소 관련 낱말들로 말놀이를 했던 터라, 나름 고심해 낱말 두 개를 골라 칠판에 썼다. 그것은 '시금치'와 '교회'였다.


시금치는 아이들이 유독 경기를 일으키는 채소 중 하나이고 교회는 내게 미지의 장소다. 모태 신앙인 천주교는 어릴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가 데리고 다니다 얻은 유아 세례명만 남아 증거 할 뿐, 지금은 신앙인이라는 다른 증거를 찾긴 어려우니 딱히 나를 종교인이라 칭하긴 어렵다. 그러므로 내겐 교회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는 모두 비슷하게 미지의 세계다.

이 어울리지 않는 두 낱말을 2학년 아이들이 어떤 조합으로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첫 문장을 누가 만들어 보겠냐는 내 질문에 지율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교회 천장에서 까마귀가 시금치를 씹어 먹고 있었다."

으...응? 까마귀가 왜 하필이면 교회에 나타났으며 시금치는 도대체 어디에서 물어온 것인지는 아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두 낱말로 어떻게든 문장을 만들었다는 뿌듯함이 지율이 눈빛에 어려있었다.

그래, 교회에 까마귀가 있을 수 있지. 까마귀가 시금치를 먹을 수 있지... 만 다음 이야기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미 바닥에 동댕이쳐진 탱탱볼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분명한 건, 이런 다짜고짜 전개가 오히려 아이들을 더 신나게 몰아간다는 것이다.


태근이가 손을 들어 뒷문장을 이었다.

"까마귀가 싼 시금치 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앗! '똥'은 아이들 이야기가 심심하게 전개될 때 내가 스리슬쩍 끼워 넣는 치트키인데, 태근이가 겨우 두 번째 문장에 써 버리다니! 아이들은 태근이 입에서 '똥'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이미 와하하- 뒤집어졌다. 이야기 초반에 '똥'이란 말이 나왔으면 이야기의 재미는 이제 내 조절 능력을 벗어난 것이다. 이제 이야기의 성격을 결정짓는 건 아이들의 몫이다.


웃느라 수선스러워진 교실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다음 사람은 이야기 잘 살려야겠는걸?" 했더니, 수아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몇몇 아이들이 돌림 노래처럼 "살려! 살려!"를 외쳤다. 깔끔한 수아가 바닥에 떨어진 시금치 똥을 어떻게 살릴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똥이 거름이 되어서 그 자리에서 시금치 싹이 났어요."

누군가 "와, 살렸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이야기의 흐름을 못 따라가고 무슨 소리? 할 아이들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갈 때는 귀가 쫑긋해진다. 매년 이 수업을 할 때마다 감탄하곤 하지만 '똥' 문장을 이렇게 우아하게 받아치는 수아의 말솜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아의 문장에 아낌없이 칭찬했지만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었다.


그 뒤, 호롱이가 "시금치가 무럭무럭 자라 교회 천장을 뚫었다."라고 했을 때 불현듯, <재크와 콩나무>가 떠오른다 싶더니, "시금치는 쭉쭉 자라서 하늘에 있는 거인의 나라에 갔다."라고 한 능수의 말에 이야기는 <재크와 시금치 나무>로 변질되어 갔다.



이렇게 누구나 아는 이야기로 옮아간다면 수업을 마무리할 때라는 뜻이다. 이미 '똥'도 나왔겠다, 이야기는 산으로, 아니 하늘로 갔겠다, 특별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재크'라도 튀어나오기 전에 이야기를 정리할 타이밍이었다.


"얘들아, 우린 <재크와 콩나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잖아.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지. 그럼 누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볼래?"

모든 아이들이 그다음으로 재크를 떠올렸던 걸까? 마지막 문장으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이들 손이 선뜻 올라오지 않았다.

재촉하는 내 눈빛에 로이가 구원자처럼 번쩍 손을 들었다. '재크만 안 나오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거인의 나라에 당도한 시금치 나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내게 하래도 쉽지 않은 과제 같아 보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은 내 예상 밖에서 논다.


로이는 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확신에 차서 말했다.

"목사님이 시금치 나무를 타고 거인의 나라에 올라와서 거인들과 예배를 드렸어요."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 무슨 성스러운(?) 결말이란 말인가! 아이들은 목사가 되어 시금치 나무를 낑낑 기어올라 거인들과 기도를 올리며 아멘을 외치는 내 과장된 제스처에 한바탕 뒤집어졌고, 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고 연결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로이의 말놀이 솜씨에 탄복했다. 이야기가 교회에서 시작되었음을 놓치지 않고 '재크' 대신 '목사님'을 시금치 나무에 올리는 기지를 발휘하다니. 가히 이야기꾼의 솜씨로다.


이렇게 재치 있고 빛나는 아이들의 생각을 앞지르는 이야기를 과연 내가 만들 수 있을까? 언젠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이럴 땐 조금 움츠러든다. 그래도 모방과 변형을 통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아이들에게서 또 영감을 얻었다. <재크와 콩나무>를 <목사님과 시금치 나무> 이야기로 변형해도 충분히 괜찮다.


창조의 부담감에 한 줄도 못 쓰는 내게 오늘도 아이들은 가르친다. 안 되면 기존 이야기를 변형이라도 시켜 보라고. 다른 이유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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