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매거진에 쓰인 모든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임을 밝혀둡니다.
"바람은 착하지 않고 나빠요!"
울상이 된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가감 없이 터져 나왔다. 전날 배운 '바람은 착하지'라는 제목의 동시에 배신당한 아이들의 표정이 사나웠다.
우리 반 아이들과 자연물을 활용한 만들기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아이들은 화단 주변에서 주운 낙엽이나 열매를 재료로 만들고 싶은 것들을 종이 위에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었다. 마침 바깥일을 담당하시는 주무관님께서 예초기로 화단을 벌초하고 계셨다. 항상 말끔했던 화단 주변 여기저기에 예초기에 베인 잡초들과 나뭇잎들이 널려 있었다. 활동 수업 전, 생명 존중 교육을 병행하며 절대 일부러 따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지만, 떨어진 잎이 궁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덕분에 수업 재료가 풍성했다.
활용할 수 있는 자연물이 많을수록 아이들의 아이디어는 넘쳐났다. 어떤 아이는 사람의 얼굴을, 어떤 아이는 동물을, 어떤 아이들은 집을... 떨어진 잎, 열매, 돌멩이 같은 한정된 재료로도 다채롭게 표현하는 아이들을 기특해하던 중이었는데...
순식간이었다. 획- 세차고 강한 바람이 들이닥친 것은. 요망한 날씨가 오늘도 변덕을 부렸다. 아이들과 바깥 수업하기 딱 좋은 맑고 화창했던 날씨가 심술을 부린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얼굴을 표현하려고 잘린 풀더미로 머리를, 작은 돌멩이로 눈 한쪽을 놓아두었던 민지의 도화지가 발라당 뒤집어졌다. 줄기에 붙은 잎 하나하나를 떼어내 선을 따라가며 차근차근 집 모양을 완성해 나가던 혜화의 도화지도 데굴데굴 굴렀다.
"으악!"
"이게 뭐야!"
"누가 이랬지?"
아이들의 불평은 당연했다. 보는 사람도 안타까운데 열심히 가지를 모아 둥지를 쌓아가던 어린 새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꼬. 변덕스러운 날씨를 믿고 미리 재난에 대비할 방도를 알려주지 않았던 내 잘못이 컸다. 사전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면 사후 조치라도 단단히 해야 했다.
흩어진 재료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아이들에게 도화지에 자연물 재료들을 그러모으도록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화지를 펼친 채 조심스레 이동하려 했다. 바람이 다시 획, 불기라도 하면 도화지 위의 재료들마저 휘리릭 날아갈 게 불 보듯 뻔한데 아이들은 바람의 배신을 너무 쉽게 용서한 걸까.
재료가 날아가지 않도록 도화지를 오므리라고 하자, "이렇게 종이를 모으면 돼요."하고 지성이가 예시안을 쑥 내밀었다. 보조 교사를 자처하는 영리한 아이 덕분에 아이들은 금세 착한 따라쟁이가 되었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은 바람의 변덕을 걱정할 필요 없이 각자의 작품을 완성했다. 거친 재료로 표현하는 동심에 어느 누가 미적 기준을 댈 수 있을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자연물을 모아 정성스레 표현한 작품이 갑작스러운 재난에 일순 망가졌지만, 멈추지 않고 결국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 낸 호기엔 점수를 매길 수 없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표현한 다른 친구들의 작품을 서로 감상하는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에 바람에 대한 원망은 더 이상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함께 겪은 재난은 서로를 더 굳건하게 묶는 결속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걸 이 아이들도 언젠간 알게 되겠지.
아이들 표정에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안타깝고 서운했던, 그럼에도 놓치지 않는 배움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아이들 글 속에 남았다. 자신도 모르는 깊은 마음속 응어리까지 글로 뱉어냈으니 이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며 몇 아이들의 글을 소개한다. 과정을 아는 이의 눈엔 한없이 귀해 보이는 아이들의 자연물 작품도.
내가 힘들게 만든 얼굴이 바람에 휩쓸려가서 너무 속상했다.
오늘 자연물을 주워 작품을 만들었다. 근데 바람이 다 망쳐 버렸다. 힝~ 동시에 바람은 착하지가 바람은 나쁘지가 됐다. 그렇게 장난을 쳤다. 바람이 다 망쳤다ㅠㅠ
나는 오늘 자연물로 만들기를 했다. 나는 돌멩이로 사슴을 만들었다. 근데 작은 돌멩이 찾는 게 너무 어려웠다. 찾고 찾아도 못 찾았다. 근데! 돌멩이가 벤치 밑에 있었다. 난 이렇게 말했다. "뭐야!!! 내가 그렇게 힘들게 찾았는데 제일 가까운 데 있었잖아!" 아휴, 너무 힘들게 찾긴 했지만 찾았으니까 다행이네.
벤치 밑에 세 잎 클로버가 있었다. 따고 싶었는데 자연이니깐 따지 않았다. 선생님이랑 약속을 해서 따지 않았다.
나는 오늘 자연물로 얼굴을 만들었다. 발표와 전시가 끝나고 그 자연물을 봉투에 담아야 했다. 나는 그게 아까워서 선생님한테 찍어달라고 했다. 열매는 힘들게 찾아서 가져가려고 했는데 깜빡했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