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술 중 교수님께서 펠로우 한 달 해보니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잠깐의 망설임 없이 너무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수련을 중단하고 1년 반이 넘는 시간을 앞으로 뭘 하며 살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한국을 떠나려 했고 그 담에는 돈이나 많이 벌면서 딸내미나 키우지 싶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여러 선택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자유롭기도 했지만 그만큼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감사하게도 그런 표류 가운데 등대처럼 갈 길을 비춰주는 사람과 경험이 있었다. 그 빛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니 다른 선택지들은 다시금 희미해지고 "장애인의 필요를 채우는 외과의사"라는 키워드가 선명하게 남았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인 세 가지 목표가 생겼다.
첫째 내시경. 장애인들이 협조가 어렵다, 장 천공 시에 수술할 여건이 안 된다는 이유 등으로 건강검진에서부터 소외되니 우선 내시경을 배우자. 그냥 마음 있는 내가, 나부터 하자.
둘째 대장항문외과. 장애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 중 하나인 배변 문제에 도움을 주자. 그리고 최대한 많은 외과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간단한 시술부터 각종 응급수술, 대장암 수술까지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자.
셋째 자원과 시스템. 장애인들을 케어하는 일은 절대 혼자서 못 한다. 다양한 문제들을 같이 협업해서 해결할 역량과 마인드를 갖춘 장애 친화 종합병원이 필요하다. 자원을 확보하고 시스템을 만들어가자.
이 세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잡고 병원을 찾아봤는데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첫째 둘째는 이미 검증되었고 셋째는 기대해 볼 수 있는 병원이었다. 후보로 한두 개의 병원이 더 있었지만 여기만 한 곳이 없어 선택이 어렵지 않았다.
#2.
내가 원하는 세 가지를 정말 여기서 얻을 수 있을까? 한 달여간 근무하면서 이게 내 가장 큰 관심사였다. 마치 의료 평가를 나온 사람처럼 마음속에 채점표를 가지고 병원 곳곳을 살펴봤다.
‘여기 복도가 엄청 넓구나. 휠체어 탄 분들 세 명까지도 충분히 지나다니겠다’ ‘각 파트 외래 출입문이나 대기실도 공간이 여유가 있구나’ ‘생각보다 외래 환자 받는 게 자유로워서 다행이다. 원하면 당장이라도 내 외래에 장애인들 오시라고 해서 진료 볼 수도 있겠네’ ‘내시경을 빠르게 잘 배울 수 있는 환경이구나. 외과에서 내시경실 이만큼 세팅한 곳이 있을까’ ‘여기 교수님들 수술 잘하시는구나. 그리고 내가 원하면 다른 파트에서 필요한 것들 배울 수 있는 분위기네’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감이 커졌고 신이 났다. 그리고 이 길이 맞다는 신호처럼 3월 말에 지적 장애인 한 분이 활동 보호사와 함께 내 외래에 오셨다. 정성껏 진료하고 전화로 부모님께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4월 초에는 지체 장애인 한 분이 내과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고 외과로 넘어와 수술을 받았다. 막연하게 꿈꿨던 그림이 뚜렷한 현실이 되어 외래에서, 병동에서, 그리고 수술방에서 펼쳐졌다.
지금까지의 채점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배도 어느새 순풍을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2023.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