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글라라 Jun 22. 2022

아버지는 겨울에 떠났다

시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시동생이 집에 잠시 들렀을 때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정신을 잃고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아버지를 시동생이 등에 업고 선배 한의사 병원으로 갔다. 선배는 아버지를 진맥 하자마자 뇌경색이 온 듯하니,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검진을 받은 결과 아버지는 뇌출혈로 인한 우측편마비였다.

시아버지는 30년 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의족을 하고서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던 분이셨다. 사업 실패 후, 시아버지는 시동생이 거주하는 임대아파트에 거의 홀로 누워서만 지냈다. 신경 우울증을 앓으면서 막걸리에 밥을 말아 드시곤 했다. 직장일로 거의 야근에다 출장이 자주 있는 시동생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고, 시어머니는 입주 간병인으로 중증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이 일 나가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아파트에서 아버지는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화장실에서 쓰러지셨다. 시댁 식구들은 이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 듯 보였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이후에도 시동생은 직장일로 바빴고 시어머니는 입주 간병 일을 계속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맞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아버지가 불쌍하고 안쓰럽지만 며느리인 나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를 낳고서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중대 결단을 했다. 고심 끝에 두 집 살림을 합치기로 한 것이다. 시골 전원주택을 구해서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기로 했다. 시어머니에게 둘째를 맡기고 내가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시집살이를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시어머니는 누워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남편이 자식들에게 폐가 된다며 빨리 죽었으면 하는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뱉는 분이셨다.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송장처럼 누워있기만 한 게 보름을 넘기는데 시어머니는 거침없이 "내버려두어라, 저러다 죽겠지. 쓸모없는 인생 더 살아 뭐하겠니. 자식들 고생만 시키지. 이제 그만 죽어도 여한 없다."는 말을 하셨다. 속마음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지 나는 그 말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내 집에서 시아버지 송장 치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무서웠다.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공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49제 연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갔다가 성당 게시판에서 요양병원에 대한 안내를 보았다. 그에게 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모시자고 내가 제안했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병자 성자를 위해 대세를 받고자 하였으나 치료받고 기력을 회복하시면서 대세가 아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요양병원은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고, 요양병원 바로 옆에 성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리 봉사를 나오시는 분에게 교리를 받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온전치 못한 정신에도 교리를 받았고, 교리 봉사자들의 축하를 받으며 바오로로 세례를 받았다. 

몇 달 뒤, 비싼 병원비를 계속 감당하는 것이 힘에 부친 그와 시동생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퇴원시키고 병원보다는 저렴한 요양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퇴원하면서 시아버지가 세례 받은 신자로 돌아온 것은 은총이자 축복이었다. 서너 곳의 요양병원을 거쳐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시 임대아파트로 가셨다.  

죽기로 작정하고 보름 넘게 음식을 거부하다가 되살아나셔서 1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시어머니께서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야야, 아버지가 이상하다. 숨을 안 쉬는 거 같다. 어젯밤에 깨끗이 목욕시키고 잘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숨소리가 안 들린다." 

아아, 드디어 올 것이 왔나 보다. 본당 신부님께 연락하여 병자 성자를 요청했다. 그가 신부님을 모시고 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신부님은 아버지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그냥 혼자서 조용히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다. 화장해서 고향 바다에 가서 뿌리고 싶다고. 신부님이 그에게 호통을 치더란다. 자식 된 도리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훈계하시고는 성당 연도 분과장님을 불러서 장례에 관한 일체의 것들을 교육하도록 했다. 당시 성당 연도 분과장님은 아버지가 세례 받을 당시 대부님의 동생 분이셨다. 당신이 할 일을 할 뿐이라 하시며 장례식장으로 연락을 대신해 주시고, 장례 의식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일러주고 처리해주시고. 연도며 장례미사까지 세심하게 마음을 써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타향에서 조문객이 없을 것을 예감하신 신부님께서 매 미사 때마다 알림을 하시고 신자분들이 연도에 가시도록 권유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단 한번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성당 신자분들의 위령 기도를 들으며 저 하늘로 가셨다.  

아버지 시신을 화장터 안으로 들여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복도를 오가며 서성이다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하늘에서는 눈꽃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찬바람 불고 눈송이 날리는 추운 겨울, 내 아버지가 하늘로 떠나던 그날도 그러했다. 내 생애 나의 아버지였던 두 분 모두 겨울에 떠났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가족 친지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면서도 가시는 뒷모습이 쓸쓸하고 느껴졌다. 내 나이 스물다섯. 아버지를 떠나보내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슬프고 억울하고 세상에 홀로 버려진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 시아버지는 낯선 타향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 애도를 받으며 축복 속에 가셨지만, 쓰라린 패배가 외롭고 애잔했다. 

두 번의 겨울 이별이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로 남아있다. 병들고 초췌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일은 가슴 저리는 슬픔이었다. 넋이 빠져나간 몸,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눈물조차 말라버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가슴.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삼일 동안 시동생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선배와 동료들이 조문을 왔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리에 없었다. 회사 선배의 말에 따르면 회사와 거래처에서 시동생을 찾아 난리가 났다고 했다. 공금횡령 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상황이었다. 핸드폰은 연결되지 않은 채로, 행방불명. 시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소식 두절인 상태에서 큰아들과 며느리의 배웅으로 쓸쓸히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시동생은 돌아왔다. 전국을 떠돌며 숨어 지내다가 자살할 생각까지 했지만 가톨릭 교리에 자살을 하면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에 차마 죽지는 못하겠더란다. 참회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했다. 고해성사를 하고, 아버지를 모신 추모공원에 다녀와서 시동생은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그해 겨울, 그와 나는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동생은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이별 이야기를 쓰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힘든 과정이다. 이별을 회상하고 다시 마주하기에 버거움이 있다. 

내 인생의 두 아버지, 아버지가 그립다. 시아버지는 내게 친정 아빠 같은 분이셨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젊은 시절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 사랑을 시아버지에게 듬뿍 받았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던가. 당신 딸처럼 나를 대하시며 주변분들에게 자랑하시고 참으로 많이 아끼셨다. 사업 실패로 인해 자식들에게 남기신 빚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빚을 물려주냐"라고 원망도 많이 했고 미워도 했지만 마지막 초췌한 모습은 가슴 저미게 아프고 슬펐다. 모든 것을 다 비워낸 몸,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없이 작고 여린 모습은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에게 애원하는 한없이 가녀린 영혼이었다. 살아계실 적에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해 드릴걸.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다 전달되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식들에게 큰 빚을 물려줘야 하는 패배에 자책하는 마음도 컸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 실패가 당신 잘못 아니라고,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 내려놓고 편안히 가시라고 해드릴 걸. 자책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그때는 시댁 식구 모두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많았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원망보다는 애잔함이 많다. 그렇게 떠나신 아버지가 불쌍하고 안쓰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픈 오월을 보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