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행 비즈니스석에 제공되는 공짜술들과 이런저런 생각들
갖은 수모를 겪으며 유럽 여행을 다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다리 한 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열 시간이 넘게 비행기에 갇혀 장시간 이동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이런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누구나 비즈니스석 또는 일등석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도 이코노미석에서의 불편한 경험을 할 만큼 했고, 이와 더불어 막연히 '그사세 (그들이 사는 세상)'가 궁금하기도 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값비싼 좌석은 도대체 얼마나 편안할지, 서비스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하지만 인천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비행 편 기준으로 프레스티지 클래스 (비즈니스석)는 왕복 700만 원, 퍼스트 클래스 (일등석)는 왕복 1,000만 원이 넘었기 때문에,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염원하며 수년간 열심히 카드사 마일리지를 모았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장장 125,000마일을 사용하여 라스베이거스행 프레스티지 클래스 왕복 티켓을 구입했다.
카드사 마일리지는 1,000원당 1~2 마일리지가 적립되니까 평균 1.5 마일리지가 적립되었다고 가정하면 125,000마일을 모으기 위해 약 8,300만 원 정도를 소비하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년간 적립이 가능했고, 그 사이에 결혼식도 올렸기 때문에 마일리지를 생각보다 빠르게 모을 수 있었다.
프레스티지 클래스 이상 항공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천공항의 KAL 라운지 이용 서비스도 제공되는데,
여기서부터 프레스티지 클래스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아주 아주 고급술은 없지만, 꼬냑의 대명사 '헤네시 VSOP' 정도는 있고,
그밖에 위스키, 와인, 맥주 등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즐길만한 술은 충분했다.
공항에서 탑승 시간을 기다리면서 이토록 설렜던 적이 있었을까.
난생처음 타보는 비즈니스석을 만날 생각에 너무 떨렸다.
심지어 '아, 비행기 타면 더 맛있는 술 많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라운지에서 그저 그런(?) 술로 배를 채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대한항공 프레스티지 좌석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널찍한 자리와 군더더기 없는 어메니티가 반겨주었고,
기본으로 제공되는 맛있는 음식과 술들을 기분 좋은 마음으로 즐겼다.
1. 웰컴 드링크: Perrier-jouet Grand Brut) 페리에주에 그랑 브뤼
거의 자리에 앉자마자 웰컴 드링크 주문을 받는다. 샴페인은 페리에주에 그랑 브뤼로 준비되어 있었다. 샴페인 맛과는 별개로, 그냥 난생처음 앉아보는 프레스티지 클래스 좌석에서 맛보는 샴페인은, 마치 큰 성공을 거둔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2. 새우 샐러드와 화이트 와인 (Chateau de Crain, Entre-deux-mers 2019)
화이트 와인은 소비뇽 블랑과 샤도네이로 준비되어 있었고, 평소 좋아하는 소비뇽 블랑으로 곁들였다.
3. 안심 스테이크와 레드와인 (Chateau Lestage Listrac-medoc 2015)
레드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 블렌드와 멜롯이 준비되어있었는데, 까베르네 소비뇽 블렌드로 Pick.
안심 스테이크는 비행기에서 먹는 스테이크인 점을 감안하면 훌륭했다.
4. 치즈, 크래커와 함께한 레미마틴 XO
프레스티지 좌석을 예매하고 제일 기대했던 부분은 레미마틴 XO였다. 면세점에서 구입할 때도 약 30만 원 정도인 고급 꼬냑을 프레스티지 클래스에서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술의 금액만 놓고 본다면 프레스티지 클래스 제공 주류 가운데 레미마틴 XO를 따라올 술은 없었다.)
레미마틴 XO에 대한 평가는 아래 문장으로 대신하려 한다.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5. 케이크, 하겐다즈 아이스크림과 포트와인 (샌드맨 파운더스 리저브 루비 포트)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포트와인까지 즐기고 나면, 코스의 대장정이 끝나감을 느낀다.
6. 간식으로 요청한 진라면 (매운맛)
긴 코스를 한껏 즐긴 후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요청한 진라면.
어디 가서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라면 맛집이다.
콩나물과 각종 야채와 함께 끓였지만 라면의 자극적인 맛은 살아있는 정말 맛있는 라면이었다.
7. 조식으로 나온 닭불고기와 북엇국
마지막으로 제공되는 북엇국으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프레스티지 클래스 탑승을 마무리하였다.
비행 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화장실 앞에서 대기를 하던 중, 프레스티지석과 이코노미석 사이에 있는 커튼이 잠깐 열렸다. 커튼 뒤로 빼곡히 앉아있는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이 보였다. 이코노미 클래스의 좌석들은 비좁은 공간에 수많은 좌석들이 배치되어 있어 승객들이 빽빽히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의 이유는, 30년 동안 타고 이용했던 이코노미 클래스의 전경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나는 일개 프레스티지 클래스 좌석을 처음 이용해 보는 승객이었고 (그 조차도 마일리지를 어렵사리 모아서 보너스 항공권을 구매하고, 어떻게 하면 프레스티지 클래스 서비스를 최대한 즐길 수 있을까 사전 공부도 열심히 한) 이용한 지 단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 몇 시간 만에 내가 속한 클래스에 완벽 적응하여 작은 비행기 안에서의 나의 레벨을 상대적으로 '상위층'이라고 생각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커튼이지만, 그 커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물리적인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심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그 커튼으로 하여금 '나의 클래스'와 '다른 사람의 클래스'를 생각하고 작은 비행기 안에서 조차 사람들을 '클래스'로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설국열차'라는 영화의 등장과 함께, 사람들은 특정 상황에서 좋지 않은 하위 레벨일 때 '꼬리칸', 조건이 좋은 상위 레벨일 때 '머리칸'이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만연한 '레벨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비행기에도 적용이 된다.
지구에 비하면 작디작은 비행기일 뿐이지만, 그 작은 비행기 안에서 승객들을 '머리칸'인 일등석부터 '꼬리칸'인 이코노미석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좌석에 지불한 비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이 당연한 이치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머리칸'의 서비스를 받는다고 해서 내가 '지구에서의 머리칸이 아님'을, '꼬리칸'의 서비스를 받는다고 해서 '지구에서의 꼬리칸이 아님'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는데,
눈 덮인듯한 대자연이 '우리는 지구 안에서 모두 머리칸도, 꼬리칸도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