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여행 에세이> - 17
2023년 10월부터 6개월 간 세계여행을 갈 계획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멕시코시티에 가는 것을 시작으로 중남미 쿠바를 비롯해 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을 거쳐 유럽, 터키, 아시아 등지를 돌아볼 예정입니다. 이 여행기간 동안 여행 기록을 남기고 여행에 대한 잡다한 글, 그러니까 여행 에세이를 쓰려고 합니다. 부담이 없으면 결과가 나오지 않기에 스스로에게 미션을 부과했습니다. 어느 나사 빠진 신문사에서 나에게 여행 소재의 주간 칼럼을 의뢰했다는 생각으로, 매주 한국시간 토요일 오후 9시에 한 편씩 업로드해보려 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유엔 인권선언문 제1조, 1948년
대학시절 인류학 수업이 끝난 후, 교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인권이란 무엇인가요?“ 그때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인권의 간단한 정의나 특성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회상해 보았을 때, 교수님의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그때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라고 인권선언문은 말한다. 나는 그 근거가 궁금했다. 왜? 모든 인간이 왜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는 근거가 있나?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지? 제3세계의 난민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 갑자기 솟아났거나, 혹은 엘리트주의에서 비롯한 우월감으로 인한 궁금증은 아니다. 나 자신의 존재 근거, 가치의 이유가 궁금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다들 말하니까 찾아보면 그 이유도 존재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교수님께 인권에 대해 질문을 했다. 아마 교수님은 난감했을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대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내 스스로 알게 되었다. 그런 건 없다는 것을.
인권은 인간이 만들어낸 눈부신 진보의 결과이다. 1948년 세계를 뒤덮은 두 차례의 큰 전쟁 이후,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모여 인권에 대해 선언했다. 그 후 수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노력했으며, 그 결과 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는 근거,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근거는 없다. 정말이지 아쉽지만, 없다. 만약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참 부러워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것이 있다고 믿을 수 없다. 아니, 없다고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나와 같은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루트를 착실히 밟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그래야 하는지 생각했다. 허무주의에 휘감겼고, 자신이 유물론자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렇지만 카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무력함을 극복했다. 그러고는 현실에 치여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을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러다 이번 여행에서 문득 다시 떠올렸다.
한정된 커뮤니티 내에서만 생활하다 보면 나와 주변 사람들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자신들이 지구의 스탠더드라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한국처럼 외부와의 교류가 적으며 역사적 사회적 배경, 심지어 유전자도 유사한 작은 커뮤니티라면 더욱 그렇다. 밖에 나와보면 그 착각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외국의 거리를 걸으면 다양한 사람을 볼 수 있다. 비위생적인 사람들, 구걸하는 사람들,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유쾌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 힘들고 궂은일을 하면서도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정말이지 다르다. 다르다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 외모도 언어도 자라온 환경도 역사적 배경도 다르다. 다른 사고패턴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현실인식과 행동을 한다. 지구는 그런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가득하다. 마치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이 모두 서로 다른 종의 생명체 같다. 같은 언어를 구사해서 대화를 한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나는 지구 반대편 남미의 거리를 걸으며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건방지고 반인륜적이고 천인공노할 생각을 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인데, 어떻게 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질까? 어떻게 인간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어버릴 수 있을까? 다른 생명체와 호모 사피엔스를 구별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만의 독자적인 그 무언가, 다른 동물들과 구분 짓는 특징. 나는 그것을 문학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작품들에서. 현실에 치여 아등바등하면서도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 중 가장 큰 하나는 이러한 작품들 덕분이다. 책, 영화, 드라마, 게임, 노래 … 작품들을 볼 때 무엇 때문에 즐거울까? 나는 그것이 인간 내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완성도를 떠나서 어떤 작품들은 보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작자의 정신세계를 느끼도록 한다.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모두가 제각기 다른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예술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독자적인 정신세계가 호모사피엔스만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 모든 인간이 존엄한 지는 잘 모르겠다. 동등한 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특별하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다. 그 차별점은 호모사피엔스만의 독자적인 정신세계다.
그렇다면 다시 인권선언문으로 돌아가자. 왜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질까? 완전무결하고 논리적으로 명징한 이유를 나는 아직 찾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예술 속에서 인간의 정신세계가 드러날 때 나는 즐겁다.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이 존엄과 권리를 가지고, 적합한 교육을 받고, 생활 수준이 올라가서 여가 시간을 가지고, 훌륭한 예술 작품들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예술이, 창작이 곧 인생이 되는 시대가 오면 좋겠다. 그런 날이 왔으면 하고 나는 바란다. 내 재미를, 내 삶의 만족감을 위해서.
인권선언문은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많은 인간들의 바람이다. 그것들의 총집합체다. 대학시절의 물음 그 10년이 지난 후, 고향과 동 떨어진 남미에 와서야 그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