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자기를 내보일까.
세상은 SNS의 흐름을 타고 자기고백의 시대에 도달하였다.
사람들은 왜 자기를 고백할까. 어쩌면 서로가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더 가까워지고 좁아지고 가닿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우주 저편까지도 우리 자신을 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이웃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고 담장은 높아졌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백한다. 각박한 시대, 메마른 시대에 남아있는 감성을 붙잡아 매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 너무 외로워.'
'대화가 필요해.'
그러한 '자기고백'
어린 시절. 스킨스쿠버였던 아버지는 한번 일을 나가시면 오랜 기간을 집을 비우셨다. 그렇기에 나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밤마다 파도소리 흐르고 별빛, 달빛이 내리는 바다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집에 살았다. 집 앞 평상에 누워서 한 시간에 대여섯 개씩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면서 어린날의 추억을 새기었고 아침마다 홀로 고고히 적막을 깨는 뻐꾸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던 목가적인 시절이었다.
한 학년은 한 반이 전부였고, 그중 가장 키가 큰 나는 키가 컸던 친구와 5년 동안을 짝꿍이었다. 그 아이는 걸어서 30미터 정도 되는 옆의 옆집에 살고 있어서 등교와 하교도 같이하였던 말 그대로의 소꿉친구였다.
드라마에서나 보이던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아이들과 도랑 치고, 가재도 잡고, 숙제로 개구리알을 잡으러 산으로 들로 가고 잡아온 것이 개구리알이 아니라 도롱뇽 알이었단 사실을 깨닫고 (정말 비슷하게 생겼었다) 징그러워 학교 잔디밭에 몰래 갖다 버리고 그다음해부터는 학교에 작고 귀여운 도롱뇽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메뚜기, 도롱뇽, 잠자리, 네 잎 클로버, 폭죽놀이, 물방개, 소금쟁이. 갯벌. 망둥어. 낚시. 그물에서 뛰놀기. 물수제비. 추억과 추억들.
겨울이면 누가 딱히 정하지 않아도 교회 앞 공터에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눈싸움을 하였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포대 자루를 하나씩 챙겨서 학교 뒷산에 올라가 눈썰매를 탔고 노을이 물들어가는 바닷가를 보며 시간을 흘러 보내는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가면 수많은 책들이 기다렸고 어린 시절, 그 수많은 책들은 내 즐거움이었고 좋은 친구였다. 어머니께서는 "그 시골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들을 왜 그렇게 사주셨어요."라는 나의 질문에 언젠가 이렇게 답하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재산, 돈을 줄 순 없지만 그 많은 지식들은 줄 수 있어서."라고 대답하셨다.
지식의 갈급함은 책들을 통해 채워갔었고, 지혜로운 어머니 밑에서 자라 온 나는 현명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 아니 어머니께서 나를 그렇게 키우셨다.
다시 아버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는 한 달, 두 달 집을 비우시고 일을 나가셨고 돌아오셔서는 1, 2주 동안 계시면서 휴식을 하시고 두 아들과 놀아주셨으며 고장 난 기계들을 고치셨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고치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 집안의 고장 난 것들을 고치며 놀기 시작하였다.
마당이 있는 더 큰 집으로 이사하고, 아버지께서 대문을 직접 만들며 녹색으로 페인트 칠을 하고 그걸 도우며 "도치"와 "뿌꾸"라는 두 마리 강아지와 함께 놀았던 추억. 처음으로 갖는 내 방. 동생 방. 그리고 더 넓어진 책장. 더 큰 집. 더 행복한 우리. 이삿날 밤 아버지가 시켜주신 친구네 어머니가 하시던 '멕시칸' 치킨 두 마리.
자연스러운 일상. 자연스레 철부지 아들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는 든든한 아들로. 그리고 작은 가장의 역할로 성장해나가는 그 걸음. 어쩌면 신이 한걸음 한 걸음씩 나를 준비시켜왔던 것이 아닐까.
일요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버지께서 사다주신 컴퓨터에서 어린 시절 이것저것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며 놀기도 하고, 엄마 몰래 게임을 하기도 하고. 한참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들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날도 엄마가 교회에 가신 동안 동생과 몰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예상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어머니가 대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고. 우리는 황급히 컴퓨터를 끄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느라 애를 썼다. 그때 문득 들린 대화.
'사실이 아닐 거야. 어서 전화해봐.'
'하나님 아버지.'
섬뜩. 혼란. 그리고 불안감. 아픔.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잠수를 하셨고, 동료의 착각으로 인해 산소통이 아닌 다른 것을 매고 차디찬 바다로 들어가셨다. 3초. 3초 동안 어떤 생각들을 하셨을까.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키우시기 위해 홀로 외로움을 감당하시며 먼 곳에서 일하셨던 당신은 그 3초 동안 어떤 생각을 하시고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육신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딱지가 지고 아물어 가지만 마음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면 아픔은 다른 아픔으로 잊혀지는 것일까.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람들 마음속에는 쐐기풀이 있어 서로를 껴안을수록 상처를 입는다.
장례식장. 수많은 사람들이 왔었고 그것은 아버지의 품성, 대인관계.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달려와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그 장소는 나에게 힘겨웠고 힘겨웠다.
나는 머리만 자란 아이였다. 아픔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몰랐기에 책에서 보고 읽은 사람들을 흉내내기에 바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연기하였다. 그것이 나름 아픔에 대처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장례식장을 돌아다니고, 오랜만에 만난 사촌과 놀고. 난 어리니까 이렇게 행동해야지.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잠이 들었고, 문득 내 머리를 쓰다듬는 외할머니의 손길에 잠에서 깨었다. "이 어린것이 어떡하노. 불쌍해서 어떡하노." 할머니는 오랜 시간 그리하였다.
세상이 틀어졌다.
전학 가는 날. 나의 뒷모습은 고독했고. 나의 친구들은 눈물로 나를 뒤쫓으며 보내주었다. 강아지 두 마리를 품에 앉고 어머니의 형제 자매가 사는 전주로 떠나었다.
도시는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섬과 섬을 이은 내 고향은 직선이었고 순수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구불거리고 꼬였으며 차가웠다. 나는 강해져야 했다. 첫날에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 '아비 없는 새끼'라고 욕설을 하였고 나는 그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반도 아니었고 그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는 왜 나에게 그런 분노를 쏟아부었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를 어찌 알고 나에게 다가온 것이었을까.
살아가면서 첫 싸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녀석보다 월등한 체격이었고 녀석이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첫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빠져나갈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침전하고 있었다.
"너 운동 좀 해볼래?"
어떤 선생님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사실 전주로 온 초기는 희미하다. 나를 눈여겨보셨는지 방과 후에 조용히 부르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왜 그랬을까. 무심결에 끄덕거렸던 것 같다.
투포환, 그런 종목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었는데 나는 그렇게 운동을 시작했다. 잊혀지지 않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과 무게감.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익숙함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서서 물수제비를 던지기 위해 수많은 돌들을 바다 저편으로 던져 보내던 노력은 투포환이란 종목에 생각 외로 도움이 됐었다. 아니면 나에게 소질이 있었을까.
익숙해져서 흥미를 잃을 때쯤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시작한 지 8개월. 첫 대회. 2등. 아니 1등이었나,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나도 놀랐고 지도 선생님도 놀랐고. 우린 모두 얼떨떨했다.
"저 이제 그만할래요."
"왜?"
"나는 엄마와 동생을 지키고 싶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내가 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러나 책에는 답이 적혀있지 않았다. 어디에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존재하진 않았다. 외롭고 외로움. 아버지의 빈 자리는 내 잘못이 아님에도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약자였다. 사회는 나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길 원하였고 나를 그렇게 강제하였다.
사실 그걸 거부할 힘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다는 사실 하나가 큰 약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어려워졌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이렇게 허망하게,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인간의 나약함과 헛됨을 생각하게 하였고 현실의 힘듦은 나를 더한 바닥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유머의 요소는 즐거움이 아니고 슬픔이라는 것을.'
나의 아픔을 속이기 위해 나를 즐거움으로 치장하였다. 당당함을 연기하였고 강함을 구겨 넣었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개그 프로그램과 수많은 책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는 어린 시절부터 단련해온 독서와 일기. 그리고 무심코 나갔던 글짓기 대회 등이 그 또래 아이 치고는 우수한 기량을 보였었다.
이런 모습 때문이었을까, 고백도 몇 번 받았고. 내가 좋아하던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손을 내밀지 못했다. 또 언제 이렇게 사라져갈지 몰랐기에. 어쩌면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의 발현이 그 친구들에게 벽을 두었을지도.
그 시절은 생존이었다.
나와 동생과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힘겨운 투쟁이었다.
대화는 사라져갔고 나는 엄마의 눈치를, 엄마는 우리의 눈치를 보았다.
좀 더 대화를 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서로 괜찮은지 묻지 못했고 서로 같은 아픔을 공유했기에 그 아픔의 무게를 알기에, 그리고 다들 처음이었기에 미숙하였다. 그래서 서로 보듬지 못하였다.
외롭고 외로웠으며, 안타까움이었다.
한줄기 희망은, 그러함에도 친척이었다.
한 동네에 이모들과 할머니, 삼촌이 모여 살았고 우리는 주말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모여서 함께하였다. 친척들과 함께하는 것이 또래 친구들에게 자랑이었으며 나의 즐거움이었다. 어머니에게도 그것은 버팀목이지 않았을까. 외로움은 사람의 마음을 잠식하더라.
17년. 홀로 나와 동생을 지탱하신 시간 동안 어머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우리의 부모님은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그 수많은 아픔과 외로움을 감내한다.
이토록 조건 없는 사랑, 헌신. 머리가 굳어갈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엄마 인생을 좀 찾아."
나의 이 한마디가 엄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그땐 알 수 없었다.
공지영 작가의 말처럼. "그 어떤 부모도 부모 연습을 하고 되는 사람은 없다."라는 이 한마디.
그것은 나를 찌르는 말이었으며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모든 죄를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전가하고 모든 잘못을 전가하였던 나에게 그 문장은 나의 이기심과 부도덕함, 그리고 나약함을 일깨우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지영 작가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생각했다. 생각을 나누고 소통하고 알아가고 싶다는 충동.
홀로 외로움을 훈장처럼 간직하고 살아가던 나에게, 누군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글은 정신이며, 사람을 바꿀 수 있더라.
그때 이외수 선생님의 작품을 읽었다.
"사람이 마음공부가 되어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대 가슴에 꽃이 피지 않았다면 온 세상에 꽃이 핀다고 해도 아직 진정한 봄은 아닙니다."
"지금은 한밤중 그러나 반드시 새벽은 옵니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인간답게 사는 편이 훨씬 행복에 가깝습니다."
"육신의 양식인 밥은 먹으면서 정신의 양식인 책은 안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 밥은 안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책을 안 읽는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살기는 삽니다. 다만 영혼이 죽은 채로 살아갈 뿐이지요."
마음 공부. 공허하고 메마른 마음의 땅에 내리는 단비였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 대학시절을 살았다. 사진기를 구입하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떠나고, 수업을 빼먹고 여행을 다니며 무전여행을 다녔다. 가끔은 마을회관에서 자기도 하고 경찰서에 신세 지기도 하고 교회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고 텐트를 지고 내일로 기차를 타며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자고 있는데 깨워서 프링글스를 주신 분께 이제야 감사를 드린다.)
여기저기, 이곳저곳 나를 흘려보내며 끝없이 여행을 다녔다.
이전에는 나를 사랑하지도 못하는데 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지만 이런 과정중에 생각은 조금씩 변하였고 그래서 사랑도 했었다. 그녀에게 너무 아픈 사랑은 아니었기를.
통기타를 시작하였다.
여행을 다니며 들었던 김광석 씨의 노래는 내 마음을 읽더라. 그의 독특한 음색은 자연스레 통기타라는 악기로 인도하였다. 그 뒤로는 사진기와 통기타가 함께하는 여행이 되었다. 잘은 치지 못하지만 다른 이의 만족을 위함이 아닌 나를 위한 연주였다. 나에게 바치는 나의 연주.
*그러함에도 결국 진로는 컴퓨터를 하게 되었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어릴 때부터 만져오던 컴퓨터. 언어는 통하더라. 프로그램은 그닥 어렵지 않았고 컴퓨터의 시작과 함께한 경험은 남들보다 앞선 이해와 출발점이었다.
*병무청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고, KT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홍보기획 쪽 일을 하기도 하였고 컨설팅을 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나의 신념이었다.
20대에는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한계를 정하지 말고 해보자.
30대에는 그중 가장 즐거운 일을 하나 정해서 몰두하자.
이제 내년이면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맞이하게 된다.
문득 생각하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란 무엇인지.
언어, 사진, 통기타, 다방면의 경험, 지식, 생각을 나누는 일. 음악. 미디어
패러글라이딩, 스킨스쿠버, 글, 영상, 음향.
많은 것들은 나를 키우는 자양분이었고. 이제 꽃을 피울 차례가 되었다.
브런치. 어제 내 글이 메인에 떴던 것 같다.
방문자가 수없이 들어왔고, 그들이 내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달아 들려주었다.
서로를 나누고 소통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글과 사진, 이야기.
문득. 이것이 30대에 내가 몰두하고 싶은 일이 아닐까.
나의 이야기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당신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
세상은 SNS의 흐름을 타고 자기고백의 시대에 도달하였다.
사람들은 왜 자기를 고백할까. 나는 나를 고백하여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진은 파인더를 통해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연다면
내 글을 통해서도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열고 소통하고 싶다.
이 글은 자기 보기이며,
내 글을 읽어준 2천여 명의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나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