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따라 길드는 내 몸
나이 들어가는 아름다움
얼마 전부터 거실에서 듣고 있던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좀 이상했다. LP판에 먼지가 껴서 그런가 하고 판을 깨끗이 닦아 올려놓아도 여전히 소리가 맑지 않았다. ‘왜 그럴까,’하고 시험 삼아 이 판 저 판을 바꾸어 올려놓고 들어보다 드디어 카트리지(전축 바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늘 끝이 닳아서 뭉툭해져 판의 소리골을 제대로 읽지 못할뿐더러 때로는 안으로 미끄러져 내리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거실에서는 주로 FM을 듣거나 아니면 편한 대로 CD를 들었기에 턴테이블의 카트리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미안하구나, 너를 써먹기만 했지 너도 나이가 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측은한 마음으로 카트리지를 매만졌다. 오르토폰(ortofon) 사(社)의 MC 카트리지였다. 아주 오래전에 사서 갖고 있다가 거실의 턴테이블에 장착해서 꽤나 오랜 동안 사용했다. 그런데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이었다. 카트리지를 교체해 주어야겠기에 갖고 있는 카트리지를 살펴보니 마땅한 것이 없었다. 같은 오르토폰 사(社)의 SPU 카트리지가 있었지만 거실 턴테이블의 톤암(tonearm)에는 구조상 장착이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새로운 카트리지를 구해야 하겠는데 예전과 달리 카트리지의 값이 너무 올라서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록다운 상황이었기에 오디오 가게에 가볼 수도 없기에 인터넷으로 이곳저곳을 찾아보다가 트레이드미(trademe: 뉴질랜드 최대의 온라인 경매 및 광고 웹 사이트)에서 눈에 뜨인 카트리지가 있었다. 카트리지 제조사 중 꽤 알려진 회사의 제품이었고 물품 명세를 읽어보니 마음이 끌렸다. 게다가 내 턴테이블에 달린 톤암에 장착할 수 있었고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그런데 아뿔싸,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카트리지가 MM(Moving Magnet) 방식이었다.
아주 오래전 음악을 처음 듣기 시작할 때 MM 카트리지를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얼마 뒤 MC(Moving Coil) 방식의 카트리지로 바꾼 뒤 이제껏 MM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동안 기술의 발달로 좋은 MM은 웬만한 MC 못지않다는 말을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MC로 가야 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웹 서핑(Web surfing)을 했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좀 괜찮다 싶으면 가격이 너무 비싸서 주저하게 만들었다. 며칠 뒤 나는 마음을 돌려 처음에 점 찍어 놓았던 MM 카트리지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직 안 팔리고 남아있었다. ‘그래 한번 제조사의 설명을 믿어 보자. 이 정도 가격이라면 실망하더라도 큰 손해는 아니니까,’라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눈 꾹 감고 노트북의 엔터를 쳐서 샀다.
불과 사흘 뒤 카트리지가 집으로 우송되어 왔다. 포장지를 뜯자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 케이스 속에 카트리지와 설명서가 들어 있었다. 카트리지를 조심스럽게 꺼내 턴테이블의 톤암에 장착했다. 오버행(overhang)을 조정하고 침압(針壓)을 맞추고 안티스케이팅(anti-skating)을 조절한 뒤 L/P 판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바늘을 내렸다. 과연 어떤 소리가 날까? 이때의 마음은 아날로그를 해본 사람만이 안다. 새 카트리지를 들여왔을 때 첫소리를 듣기 위해 내가 올리는 L/P 판은 항시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스코틀랜드 환상곡이다. 사십여 년 전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1악장의 하프와 함께 울리는 장중하며 몽환적인 관현악의 서주에 이어 나오는 독주 바이올린 선율이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던 기억을 평생 잊지 않고 있다. 이제껏 내가 사용했던 카트리지들은 이 판의 소릿골을 누비며 낸 바이올린 소리가 내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기에 내 것이 되었던 것이다. 과연 이 MM 카트리지가 내 가슴을 시리게 만들어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판 위에 바늘을 내렸다. 다행히 관현악의 서주에 이어 나오는 하이페츠의 바이올린은 사십여 년 전 나를 감동시켰던 바로 그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됐다, 이만하면 괜찮아. 아직 에이징(aging: 기계, 특히 오디오에서 연관 기기끼리 조화롭게 어울리기까지 길드는 과정)도 안 된 상태에서 이 정도라면,’하고 스스로 만족하다가 나는 돌연 에이징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에이징이라는 말의 원 뜻은 길들다가 아니라 노화(老化)였다. 그렇다, 사십여 년 전의 내 귀와 지금의 귀는 같을 수가 없다. 노화된 내 귀는 생각지 않고 나는 좋은 카트리지만 찾았던 것이다. 지금 판 위에서 소리를 찾아내는 저 MM의 카트리지는 제조사의 말대로 MC 못지않은 소리를 내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 귀가 예전 같지 않기에 지금 들리는 소리가 괜찮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면 눈이 노안(老眼)이 되듯 귀도 노이(老耳)가 되는 당연한 이치를 깜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픽하니 속으로 웃었다. 문득 몇 년 전에 써서 어딘가에 발표했던 자작시(自作詩)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노안(老眼)이라는 제목의 시(詩)였다.
노안(老眼)
젊었을 땐
십 대의 여인만 소녀로 보였다
언젠가부턴
삼십 대의 여인까지도 소녀로 보였다
요즈음은
모든 여인이 소녀로 보인다
노안(老眼)에 비친 여인은 모두 아름답기만 하다.
나이가 들면 누구라도 늙고 몸이 노화한다. 우리 몸에서 제일 먼저 노화되는 곳이 눈과 귀라고 한다. 따라서 노안(老眼)은 병이 아니고 자연적인 현상이다. 전보다 안 보인다고 속상해 하지 말고 아직도 볼 수 있는 시력이 남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주어진 시력에 맞춰 살면 된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의 대부분은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이다. 꼭 보아야 할 것만 눈을 크게 떠서 보고 살 때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육안(肉眼)이 흐려질수록 점점 밝아지는 심안(心眼)이 있지 않은가!
귀도 마찬가지이다. 나이가 들면 노화되어 청력(聽力)이 약해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들을 필요가 없다. 듣지 않아도 좋을 소리는 자연스레 넘기고 꼭 들어야 할 소리만 듣고 살면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덕(德)이 될 것이다.
나이 들어서 이런 눈과 귀를 가질 수 있다면 이런 눈과 귀는 노화(老化)한 것이 아니고 에이징이 잘 된 것이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내 몸 밖의 사물과 조화를 이루면서 볼 것만 보고 들을 것만 듣게 길든(에이징) 것이다. 카트리지와 같은 기기(器機)는 노화되면 버릴 수밖에 없지만 생명이 있는 우리의 눈과 귀는 세월이 지나도 우리의 마음에 따라 잘 길들 수가 있다. 에이징이 잘 된 기기가 주변 기기와 잘 어울려 최상의 효율을 내듯 나이 든 우리의 눈과 귀도 마음먹기에 따라 노년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거실 턴테이블의 카트리지를 교체하면서 나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MC 카트리지 대신 MM 카트리지를 장착하고 이만하면 소리가 괜찮다고 느낀 것은 그동안 발달한 기술 덕분에 MM 카트리지의 성능이 좋아졌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이든 내 귀가 잘 에이징이 되었기에 소리가 그렇게 좋게 들렸을 것이다.
노안에 비친 모든 여인이 소녀처럼 아름답게 보이듯이 에이징이 잘 된 귀에 들리는 소리는 모두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 눈과 귀뿐이 아니라 나이 들어가는 몸의 모든 기관이 노화(老化)가 아닌 에이징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순응할 때 우리 노년의 삶은 나이 들어가는 아름다움으로 그윽해질 것이다.
추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이틀 뒤면 2022년 새해가 됩니다. 더 나이 든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나이 따라 길드는-에이징 되는- 몸에 순응하셔 더욱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021. 12.30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