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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Oct 31. 2023

다시 책을 내면서

길고 흰 구름의 나라에서 돌아와서 쓴 석운의 ‘화요음악회’ 이야기

다시 책을 내면서, 길고 흰 구름의 나라에서 돌아와서 쓴 석운의 ‘화요음악회’ 이야기

안녕하세요? 작년에 ‘화요일의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냈습니다. 책의 내용은 길고 흰 구름의 나라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교민들끼리 모여 클래식 음악을 들었던 ‘‘화요음악회’’ 이야기였습니다. 책에서 밝혔듯이 ‘화요일의 클래식’은 결코 음악 해설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같이 들었던 음악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그 속에는 고국을 떠나 사는 교민들이 매주 화요일 저녁에 모여 음악을 들으며 서로를 위로하던 외로움이 녹아 있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아마추어 애호가의 서툰 음악 이야기가 오히려 신선해서였는지 책을 읽은 분들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습니다. 더구나 ‘화요음악회’의 내력을 알고 계신 분들은 아직도 ‘화요음악회’에 관하여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왜 속편(續篇)을 쓰지 않느냐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고마운 말씀이었지만 자신이 없어 망설이다가 시간만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제 신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올해(2023년)에 우리 부부가 30년 가까이 살았던 뉴질랜드를 떠나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것입니다. 


두 나라에서 살 수 있었던 행운

삼십 년의 세월을 뉴질랜드에서 살았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이국땅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을 꼭 한나라에서만 살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커다란 행운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뉴질랜드였으니 축복받은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또한 축복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그리고 다양한 동호회 모임에서 만나는 분들과 사귐을 나누며 삶의 영역을 넓혀가던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또한 10년 전부터 우리 집에서 열어 왔던 ‘화요음악회’는 참석하는 회원분들과 음악을 중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는 유익하고 보람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그런 바람에 변화를 불러온 것은 약 3년 전에 시작된 코로나였습니다.

2020년 1월에 아내와 같이 고국을 방문했습니다. 모처럼 연초에 갔기에 친척들도 만나고 친구들과 회포도 풀고 싶었지만 중국에서 발발하여 별안간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로 인해 쫓기듯 뉴질랜드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안 쓰던 마스크를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때 저는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을 고국과 뉴질랜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제 몸과 마음의 불안정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의문이 생기자 가슴이 답답해진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도 조국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귀국해서 힘을 합하여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국에 코로나가 퍼져 모두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도망치듯 뉴질랜드로 돌아가고 있는 저의 모습이 너무 비겁하고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코로나가 깨우쳐 준 정체성(正體性)

‘이제는 돌아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코로나에 쫓겨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는 코로나 사태만 진정되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작정하였습니다. 코로나와 같은 세계적인 전염병을 평생 처음 겪는 저로서는 이 사태가 그렇게 오래 계속될지는 몰랐습니다. 가장 안전할 것 같았던 뉴질랜드에도 코로나는 들어왔고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습니다. 더 이상의 확대를 막기 위해 정부는 국경을 막았습니다. 아무도 들어올 수도 없었고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길어야 몇 달이면 끝이 날 줄 알았던 코로나 사태는 해가 바뀌어도 진정이 안 되었고 좀 잠잠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일어나 극성을 부렸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그렇게 좋아했던 ‘화요음악회’도 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2년 반이 넘도록 계속되다가 다행히 2022년 봄부터 코로나의 세력이 약해지자 정부는 국경을 열었습니다. 하늘길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우리 부부는 곧장 고국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마음껏 고국산천을 누볐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고국의 하늘과 땅은 우리 부부를 반겨주었고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친지들과 친구들은 넉넉한 가슴과 따뜻한 손길로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이번에 가면 정리합시다.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된 거 같소.” 두 달 동안의 고국 방문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저도 이번 여행을 통해서 고국이 얼마나 좋은지를 실감했어요. 제 몸에 맞는 옷같이 편안하고 자유스러워요. 우리가 이제 무얼 더 바라겠어요. 고국에서 맘 편하고 자유롭게 여생을 살면 되지요.” 평소에 말을 아끼던 아내가 웬일인지 마치 준비해 놓았던 것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생각나게 하는 아내의 대답에 저는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

거의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을 같이 살며 우리 부부는 호사스럽게 살지는 못 했어도 자유롭게 살아왔습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무엇인가를 크게 바라지도 않았기에 두려움 없이 훌훌 고국을 떠날 수도 있었고 낯선 곳에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옛 둥지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삼십 년 전 그렇게 담담하게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다시 담담하게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은 삶을 고국에서 산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두려울 것도 전혀 없습니다. 머물고 떠나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부부야말로 ‘우리는 자유다’라고 마음껏 외칠 수 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 돌아가서 자유롭게 또 새로운 삶을 삽시다,”라고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며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삼십 년 뉴질랜드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이국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에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집도 가구도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장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가장 버리기 힘들었던 것은 삼십 년간 그곳에서 쌓아 놓았던 사람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돌아오기 몇 달 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분들과 만나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지만 이별이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특히 십 년 동안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음악을 같이 들었던 ‘화요음악회’ 회원들과의 이별은 가슴이 무너지도록 힘들었습니다. 마지막 모임에서 우리 부부의 손을 잡고 울먹거리던 한 분 한 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화요일의 클래식’에 이어서 또 다른 책을 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이분들의 사랑을 결코 잊지 말자. 이분들과 같이했던 시간도 잊지 말자. 지난번 책에서 못다 한 ‘화요음악회’ 이야기를 마저 써서 책으로 남기자. 훗날 같이 책을 보며 추억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분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다.’


고국에 돌아와서

벚꽃이 흐드러지던 지난 3월 말에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태어나고 자라난 고국이지만 지난 30년의 공백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30년간 변화한 고국은 제 머릿속에 담겨있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나이 들어 굳어진 몸과 마음으로 고국에 돌아와 제3의 삶을 정착하자니 이런저런 일로 꽤나 분주하고 바빴습니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책을 내기로 한 나와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그 사이 벚꽃이 지고 더운 여름이 왔다 갔고 가을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열심히 쓴 ‘화요음악회’의 이야기가 모여 다시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거리엔 떨어져 내린 수많은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습니다. 낙엽만큼이나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즈음 세상에 이 작은 책은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또 하나의 낙엽일 것입니다. 하지만 길고 흰 구름의 나라 뉴질랜드에서 ‘화요음악회’를 사랑했던 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분들과 같이 들었던 음악과 아름다운 추억을 여러분께 알리고 싶어 이 책을 냅니다. 부디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23년 11월 정이정(淨耳亭) 청지기 석운(夕雲) 김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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