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나는 무엇을 알았기에 이런 글을 써놓았을까?
'내 친구 시인(詩人)' - 22년 전 나는 무엇을 알았기에 이런 글을 써놓았을까?
아내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지난 토요일 오후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타들고 서재로 올라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음악을 틀고 노트북을 열었다. 얼마 전에 가입한 오클랜드 문학회 카페에 들러 회원들이 올린 이런저런 글을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분이 <한 줄 메모 글> 난에 써놓은 '거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날이면 웬 지 모를 죄책감에 서랍을 열곤 한다'라는 글이 눈을 찌르듯이 들어왔다. 그리곤 나도 급작스레 웬 지 모를 죄책감(혹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내 노트북 한 구석에 잠들어있는 정말 오래전에 써놓은 글들이 있는 서랍(파일)을 열어 보았다.
거기엔 참 오래전 젊었을 때 써놓은 시와 수필을 비롯한 여러 가지 단상 모음이 잡다하게 있었다. 써놓긴 했지만 스스로 부끄러워 그리고 내놓을 용기도 없어 서랍 속에 꼭꼭 닫아놓고 몇십 년이 지나간 불쌍한 내 분신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무심하게 지나간 세월이 참 오랜데 오늘 문학회 카페에서 만난 메모 글 한 줄이 별안간 비수같이 내 마음을 찔러 꼭꼭 닫혀있던 서랍을 열게 했으니 짧아도 글의 위력이란 참으로 대단하였다. 이것저것을 읽어 보다가 22년 전에 써놓았던 '내 친구 시인'이란 시(詩)를 보면서 이곳 뉴질랜드로 오기 전엔 자주 만났던 그 친구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게 나기에 용기를 내어서 처음으로 카페에 싣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시인들의 시는 읽기도 많이 하고 감히 평을 한 적도 많지만 막상 내가 쓴 시에 대해서는 아직도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나 스스로와 내가 젊은 날 써놓았던 글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으로 감히 문학회 카페에 올린다. 써놓은 글들을 서랍 속에만 가두어 놓는 것은 부끄러워 고백하지 못한 사랑처럼 비겁하고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92년 6월 29일, 나를 찾아왔던 내 친구 시인(그는 50년대 우리 시단을 휩쓸었던 유명한 시인의 아들이다)과 대낮부터 퍼 마시고 돌아온 늦은 밤에 "요샌 마셔도 취하지도 않아"하며 쓸쓸하게 돌아서 가던 그 친구 생각이 나서 써놓았던 글이다.
내 친구 시인(詩人)
남쪽에서 비 소식이 들려왔던
6월의 어느 오후
열어 놓은 창(窓) 사이를 드나드는 바람처럼 문득
내 친구 시인이 나를 찾아왔다.
쓰알 놈의 자슥들 나 오늘부터 실업잘세
이따가 한잔 어때하며 털썩 주저앉는
그의 모습에서 유독 불거진 배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나는 씁쓸히 웃었다
한두 번 때려치운 직장이 아니었기에
그의 말은 이미 뉴스가 될 수 없었으나
왠지 그 오후 나는 선뜻 그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없었다
배 말인가
쓰알 놈들 하고만 있었더니
시(詩)는 안 나오고 배만 나와
내 시선을 느꼈던지 뒷머리를 극적 거리며
그가 말했다
순간 나는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도록 웃었다
왜 그래 이 사람
머쓱해진 그가 야단맞는 어린애의 눈길로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무작정 그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남쪽 어디선가 비가 내리고 있을 그 오후
우리는 대낮부터 마셨다
배가 나오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두 사내가
부끄러움도 없이 시(詩)를 이야기하며
술이 목젖까지 차도록 마신 그날은
참으로 오랜만에 시인(詩人)의 친구가 된 날이었다. (92. 6. 29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