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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Dec 22. 2023

그가 남겨놓은 일기장

그는 화석이 되고 싶었다

그가 남겨놓은 일기장

 

어느 날 아침

그는 든든히 아침을 챙겨 먹고

빙하의 계곡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하면

그는 화석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육체로 태어난 인간의 마지막 소망

 

-그가 남겨 놓은 일기장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신이 불행한 이유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하다

마음껏 살다 지루하면

언제든 삶의 끈을 놓을 수 있으니까

 

불멸이 아니기에 슬픔이 숙명이지만 

그래서 행복한 필멸의 존재, 너 인간이여,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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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라졌다. 빙하의 계곡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소망대로 화석이 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음은 대학시절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그가 처음 읽으려고 펴 들었던 시(詩)가 엘리엇의 황무지였다. 그러나 황무지의 첫 연(聯)을 읽기도 전에 그의 눈을 붙잡은 것은 ‘보다 훌륭한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바쳐진 제사(題詞)였다:

 

정말 쿠마에에서 나는 한 무녀(巫女)가 항아리 속에 달려 있는 것을 똑똑히 내 눈으로 보았다.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하고 물었을 때 무녀는 대답했다.

‘난 죽고 싶어.’

 

죽고 싶다니, 왜 죽고 싶었을까? 그리고 쿠마에 무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의문에 그는 황무지를 뒤로 하고 우선 쿠마에 무녀를 알기 위해 도서관에 파묻혔다.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 그는 며칠을 꼬박 책에 묻혀 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내었다.

 

쿠마에 무녀(Cumaean Sibyl)는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쿠마에에 살았다.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던 이 무녀를 아폴론 신이 몹시 사랑했기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아폴론에게 한 주먹의 모래를 들고 와서 모래의 숫자만큼 생일을 갖게 해달라고 말했다. 애석하게도 무녀는 오랜 생명만을 요구했지 젊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한 가지 소원만 들어주기로 했기에 젊음은 요구했어도 거절당했을 수도 있다.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져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죽지 않았지만 육체는 계속 늙고 쇠약해져 줄어들어 나중에는 마침내 목소리만 남았다. 축복이 되어야 할 장수(長壽)가 오히려 그녀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저주가 되었다.

 

쿠마에 무녀의 이야기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삶은 영원하지 않다. 무녀의 손에 담겼던 모래의 수효가 아무리 많다 하여도 결국 끝이 있다. 그나마 늘리고 늘린다 해도 젊음이 수반되지 않는 장수(長壽)는 저주일 따름이다.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쿠마에 무녀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은 채 그는 뒤로 했던 엘리엇의 시(詩) 황무지를 다시 폈다. 이런 제사(題詞)로 시작되는 시라면 무녀가 갖지 못한 온전한 영원으로 가는 길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시를 읽기 시작해서 처음 일곱 줄을 읽은 뒤 그는 그만 읽기를 중단했다. 황무지의 처음 일곱 줄은 다음과 같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작은 생명을 대어주며.

 

여기까지 읽었을 때 그는 왜 엘리엇이 쿠마에의 무녀 이야기를 제사로 넣었는지 그리고 이 장편의 시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미 알아버린 것 같이 느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4월은 봄이 시작되는 달이며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온갖 생명이 땅 속에서 부활하는 달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못 박았다. 삶 혹은 살아나는 움직임보다는 차라리 망각의 눈에 덮인 따뜻한 대지 아래 영원히 잠들어 있는 상태가 행복하다고 생각했기에 시인은 그 잠을 흔들어 깨우는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하였다. 시인은 영원한 삶이나 아니면 다시 살아나는 재생 혹은 부활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땅을 망각이라는 이름의 눈(雪)으로 뒤덮고 있는 겨울이 따뜻하여 좋다고 노래하고 있었다.

 

20세기 전 세계의 시단(詩壇)을 뒤흔들어 놓았다지만 이 시는 결코 그가 원하는 것을 알려주는 시가 아니었다. 그는 이 시를 읽기를 포기하였다. 아니 사양하였다. 하지만 이 시는 그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품어왔던 영원(永遠)에 대한 희구를 다시 일깨웠다. 중학교 2학년 때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 ‘왜 사람은 죽어야만 하는가’ ‘영원히 살 수는 없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의문을 풀겠다고 혼자 다짐하여 왔던 그였다.

 

그때부터 영원을 향한 그의 도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다시 도서관에 파묻혔다. 수많은 책을 탐독했다. 그러나 어떤 책도 그가 원하는 답을 알려주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그는 휴학계를 내고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원이 전제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고 그런 삶을 조금 풍요롭게 하기 위한 학교 수업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가 가까운 친구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일 년 뒤에 그는 학교로 돌아왔지만 지난 일 년 간 그가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학교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지남철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강의에 들어가긴 했지만 맥 놓고 앉아 있다가 교수님에게 핀잔을 듣기 일쑤였고 강의가 없을 때엔 주로 학교 앞 다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시 사라졌다. 아무도 그가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 몰랐다. 강의실에서도 또 학교 앞 다방에서도 그를 볼 수가 없는 날이 한참이나 계속된 뒤에야 학우들은 그가 다시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지만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또 학우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져 갔다. 어쩌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는 그가 절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고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신학대학에 다닌다고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다른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도 진실은 몰랐다. 그렇게 그는 잊혔고 다른 학우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각기 갈 길을 갔다.


누군가가 빙하로 들어가 나오지 않아서 수색대가 파견되었고 헬리콥터가 떴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티브이에서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그가 그인 줄 몰랐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를 찾으러 들어갔던 수색대가 들고 나온 것은 그가 메고 들어갔던 배낭이었다. 배낭 속엔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그의 일기장만 있었다. 일기장에 적힌 그의 이름이 공개되었을 때 그를 알고 있었던 동창들은 이제는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옛날을 회상하며 ‘결국 그 친구가.......’하고 중얼거리다 말을 맺지 못했다.

 

그가 남긴 일기장엔 몇 편의 글이 있었지만 제일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과 그의 유언 같은 마지막 고백이 있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구약 전도서 3장 11절)

 

제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 당신께 감사드려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평생 영원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씀에는 저는 끝내 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까? 저는 오히려 ‘난 죽고 싶어,’라고 했던 쿠마에의 무녀의 심정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것 같습니다. 영원을 사모할 순 있어도 가질 수 없다면 전 차라리 화석이 되겠습니다. 영과 육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영원한 화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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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蛇足), 글쓴이의 생각: 그가 생각하고 추구한 영원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영원과 달랐다. 하나님의 영원은 하나님 자신이었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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