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한 봉쇄령(lockdown)과 산책
봉쇄령과 산책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에 봉쇄령(lockdown)이 내린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전염병(코로나 19)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 사람과 사람의 대면을 막는 것이었으므로 그를 위하여 내려진 특단의 대책이 봉쇄령이었다. 봉쇄령 아래서 국민 모두는 특별한 혹은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에 머물러야 했고 허용된 바깥 활동은 집 동네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산책이었다. 산책은 할 수 있으되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만날 때는 반드시 2미터 이상의 사회적 거리(距離)를 두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평생 처음 겪는 봉쇄령이었기에 우리 부부도 처음엔 갑갑해서 어떻게 지낼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며칠이 지나면서는 자연스레 적응하면서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하루하루를 지냈다. 계획대로 안 지켜지는 것도 있었지만 걷기도 하고 햇볕도 쬐기 위한 산책은 빠트리지 않고 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 바다도 있고 들판도 있고 작은 동산도 있고 걷기 좋은 주택가도 있어 다양하게 코스를 바꿔가며 매일 산책을 했다.
어색한 산책 풍경
봉쇄령이 내린 뒤 대부분의 거리는 한산했지만 산책하는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그리고 혼자 걷는 사람보다는 부부나 가족 단위로 걷는 사람이 많았다. 전에는 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거나 아니면 Hi 또는 Hello 같은 가벼운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끼리 눈인사마저 하기 힘든 한국과는 달리 뉴질랜드 사람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든 눈을 맞추고 눈짓이든 몸짓이든 말이든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물론 국토에 비해 인구가 적으니 어디서든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그렇게 하기도 하겠지만 사람들 자체가 아직 순수하고 정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그런 뉴질랜드의 길거리 풍경은 정겨웠다.
그런데 봉쇄령이 내린 뒤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바뀌었다. 길을 걷다가 멀리서라도 마주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면 벌써 어딘가 경계하는 모습이 보이고 가까워지면 길 한쪽으로 등을 보이며 비켜서거나 길에 여유가 있으면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지나치곤 했다. 처음엔 우리 부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워 사람이 마주 오면 한쪽으로 서서 가만히 자나 가기를 기다렸지만 며칠이 지나면서는 우리도 아예 멀리서부터 길 한쪽으로 비켜서 지나갔다. 전에는 마주치면 서로 미소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했지만 이제는 서로 계면쩍은 시선을 주고받거나 아니면 눈길마저 피하고 지나쳤다. 소위 코로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距離) 지키기가 급조해 낸 거리의 모습이었다.
비 오는 날의 산책
그날 오후는 하늘이 잔뜩 흐렸고 바람이 불었지만 일기예보를 보니 큰비는 없을 것 같아 아내와 같이 집을 나섰다. 날씨가 안 좋아도 온종일 집에만 있기보다는 그래도 밖으로 나와 좀 걷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비를 대비해 우산을 들고 주택가를 걸었다. 바닷가는 바람이 셀 것 같아 주택가를 걸으면 바람도 막아주고 또 여차하면 쉽게 비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찾아든 주택가였는데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한적한 주택가였지만 군데군데서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주 가끔이지만 마주 오는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한쪽으로 비켜서며 거리를 유지하고 지나쳤다. 그럴 때마다 억지로 미소를 교환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 느낌은 우리 부부나 마주 오던 상대방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가 왜 이래야만 하나’하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서로의 가슴속에 오갔을 것이다.
잠시 뒤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주 가느다란 부슬비였지만 우리는 우산을 펴고 걸었다. 저만치 맞은편에서 우산을 쓰고 오는 남녀를 만났을 때 다시 거리를 유지하며 떨어져서 지나치며 이번엔 우산에 가려서 눈인사마저 못 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들의 뒷모습을 옆 눈으로 지켜보며 나는 무언가 서러운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반가워하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듯 떨어져서 지나쳐야 한다는 상황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거리에 비가 내리듯
다시 우산을 받치고 조금씩 떨어져 내리는 빗속을 아내와 같이 걸으며 나는 문득 그 옛날 젊은 시절에 읽었던 시구(詩句)가 생각났다.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속에 눈물이 흐른다
무엇일까 내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이 우수(憂愁)는?
폴 베를렌느( Paul Verlaine)의 ‘거리에 비가 내리듯’이라는 시(詩)의 첫 구절이었다. 마음속으로 이 구절을 되뇌다가 나는 혼자 피시 쓴웃음을 웃었다. 별안간 이 시구가 떠오른 이유가 ‘거리’라는 첫 단어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이 시에서의 ‘거리’는 길거리를 뜻하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거리는 거리(距離)였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길) 거리에 비가 내려 마음속 깊이 우수가 스며든다고 했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을 떨어지게 만드는 거리(距離)에 비가 내리는 것을 느껴 마음속에 뭐라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산(雨傘) 아래에서의 단상
과연 코로나가 무엇이길래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렇게 떼어놓았을까? 우산을 받쳐 들고 빗속을 걸으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은 이제부터 세상의 역사는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물리적 접촉을 통해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던 이제까지의 방식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다. 이제까지의 세상의 행동방식은 대면(對面)의 문화였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끼리 서로 만나 얼굴을 맞대고 하였다. 앞으로는 비대면(非對面)의 문화로 가능한 사람끼리 만나는 것을 피해 일을 처리하며 부득이 만나야 할 때는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신(神)과의 관계, 이 모든 관계가 친밀할 때에 세상은 순조롭게 돌아갔고 이 관계에 이상이 생길 때 세상의 평화는 깨어져 나갔다. 그런데 앞으로 AC(After Corona)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강요된 거리(距離)를 지키며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최선의 관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관계는 어떻게 변하거나 혹은 파괴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런 새로운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이제껏 인류가 자랑해 오고 우상처럼 섬겼던 문명과 문화적 이기는 이제 그 오만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의 몇백 년 간을 ‘축(軸)의 시대’라고 불렀고 누군가에 의하면 인간은 아직까지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고 했다. 인지(仁智)가 발달하고 발달하다 못해 인공지능(AI)까지 등장해 첨단의 기술과 이론을 자랑하는 이 시대가 불쑥 튀어나온 코로나 바이러스에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져간다면 이제 우리 모두는 겸허한 자세로 역사의 뒤안길을 돌고 돌아 차라리 ‘축의 시대’의 현자들에게 오늘의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가슴속의 울림, 지진(地震)
이런 생각에 잠겨 빗속을 걷고 있자니 점점 더 가슴이 답답해졌다. 받치고 있던 우산을 조금 들어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비구름이 가득 드리운 낮은 하늘이 차츰 머리 위로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젖힌 우산 너머로 그런 하늘을 바라보는 내 가슴이 조금씩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답답해서 가슴이 울리나 했지만 가만히 주의를 집중하니 내 심장을 통해 울려오는 그 쿵쾅거림은 보통의 울림이 아니었다. 마치 크고 작은 네 개의 현악기가 하나가 되어 빠르고 힘차게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나는 내 심장을 진동시키고 있는 울림이 어떤 음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진(地震)’이로구나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 울림은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의 피날레 곡인 ‘지진’이 분명하였다. 왜 이 순간에 ‘지진’이 가슴속에 울렸을까 하고 생각하는 다음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께서 마지막 일곱 말씀 뒤에 돌아가시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震動)하였다(마태 27:51)’고 성경은 증언한다. 하이든의 ‘지진’은 그때의 상황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이었다. 성소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距離)가 없어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그때까지의 하나님은 항시 높고 두꺼운 성소 휘장 뒤에 계셨고 보통 사람은 성소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번 목숨을 걸고 휘장을 제치고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이 휘장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찢으며 돌아가시면서 둘로 찢어버린 것이다. 휘장이 제거됨으로 창세 이래 신(神)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던 거리(距離)가 없어진 것이다. 그 후로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아무런 거리(距離) 낌 없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진이 던진 질문
그날 빗속을 걷고 있던 내 가슴속에 하이든의 음악 ‘지진’이 울렸던 것은 그냥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창조주마저 인간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외아들 예수의 목숨을 희생하여 신과 인간의 거리를 없애버렸는데 과연 코로나가 무엇이길래 ‘사회적 거리 두기’란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는지 음악을 통하여 내게 물은 것이었다. 코로나가 무엇이길래 이제껏 사람들이 만나면 반가워서 가까이 다가가고 손을 붙잡고 흔들고 볼을 비비던 좋은 관계는 사라지고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면 슬슬 피할 준비를 하다 급기야는 계면쩍은 모습으로 멀찍이 떨어져 지나쳐버려야 하는지 내게 물은 것이었다. 빗속을 걸으며 나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코로나는 사라져 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대로 AC(After Corona)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때에 대비하여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비대면(非對面)의 세상에서 계속 사회적 거리 두기의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살든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잠시 궁여지책으로 지켰던 거리 두기를 타파하고 다시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여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몸은 간사한 것이라서 곧 습관에 물들기 쉽다. 잘못하면 몸이 우리 정신의 주인 노릇을 하려 들 수도 있다. 나부터도 벌써 한 달이 넘게 사회적 거리 두기의 봉쇄령 아래 생활하다 보니 길에서 사람만 만나면 나도 몰래 슬몃슬몃 뒤로 피하고 난 뒤 그렇게 피하게 한 것이 내 의식이 아니라 내 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랬다. 이러다가는 정신보다도 ‘몸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과제를 실천해 나가는 실존적 주체’라고 주장한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의 주장이 맞아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쓴웃음을 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의 세상을 믿고 싶지 않다. 역사를 나누는 기원은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족하다. 조만간 코로나는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이번 코로나 사태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 지나간 세상의 순수와 사랑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십 세기 후반으로부터 시작된 지나친 물질주의와 과학만능주의는 인간의 육신에 많은 편안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대신 인간의 심성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좋은 것을 빼앗아갔다. 이제 다시 그 빼앗긴 것을 찾을 때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복구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더욱 벌어지게 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距離)가 원상으로 복구되었으면 좋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소멸한 뒤에도 이로 인해 벌어져 버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야기한 사회적 충격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가 숙고해야 할 또 하나의 거리는 지나간 세기 동안 우리 스스로 키워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생겨난 보이지 않는 거리이다. 이 거리(距離)의 이름은 프라이버시(privacy) 혹은 사생활이다. 지금처럼 물질의 풍요가 넘치지 않았던 지난 세기의 삶 속의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는 거리가 없거나 있어도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아주 작은 거리가 있을 따름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서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렵던 시절 같이 지내던 식구들이 각자의 방이 생기자 흩어졌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벌어져 거리가 생겼고 한 방에서 같이 뒹굴며 지내던 형제자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헤어졌다.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티브이를 보며 같이 웃던 가족들이 각자의 방에서 컴퓨터로 스마트 폰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없어지고 ‘나’만 남게 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그 사이가 사회이건 직장이건 가족이건 하다못해 부부 사이까지 멀어지기만 했다.
그 거리가 멀어지면서 공유의 미덕은 사라지고 독점의 욕구만 점점 더 강해졌다. 누군가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조금이라도 프라이버시 안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사람들에게서 듣는 비난은 ‘상처(傷處) 받았다’였다. 그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오히려 더욱 많이 생겼다. 부모 자식 간에, 부부간에, 사제 간에, 친구 간에, 가까울수록 생기는 상처가 제일 많았고 제일 깊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서로 간에 냉담하게 되었고 더욱더 거리를 벌려가게 되었다. 자연의 순리대로 가장 가까워야 할 남녀 간의 거리마저 벌어져 독신을 주장하게 되었고 부모 자식 간의 거리도 멀어지다 못해 아예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커져 버린 이 거리(距離)는 아마도 코로나가 야기한 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비극적인 거리이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 더 문제인 것 같다.
다시 그 좋았던 시절로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가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침착하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이 거리(距離)의 문제를 다시 점검하며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나온 우리의 삶과 우리의 빗나간 역사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천 년 전 하나님은 신(神)과 사람과의 거리(距離)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를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며 성소의 휘장을 찢어버렸다. 그 휘장이 찢어졌기에 우리는 그동안 직접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다.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져 내렸지만 과연 맨 처음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은 누구일까? 하나님과 대면은커녕 두려워서 감히 그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던 그 당시의 사람 중 누가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휘장 안으로 첫발을 들이밀 수 있었을까? 성경에도 그리고 그 어떤 고대의 문헌에도 맨 처음 성소로 들어간 사람의 이름은 남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익명의 첫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없어졌고 우리는 마음 놓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와 대면할 수가 있게 되었다.
코로나가 만들어낸 사회적 거리가 그 옛날 하나님 혹은 신과 인간과의 대면을 가로막았던 성소의 휘장보다 두꺼울 수는 없다. 이제 곧 코로나는 사라질 것이고 또한 봉쇄령도 해제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봉쇄령 기간 동안 강요되었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습관이 되어 자칫 나와 너의 사이의 거리가 계속해서 멀어져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비극일 것이다. 이천 년 전 찢어진 휘장 안으로 첫 발을 디딘 익명의 사람처럼 우리 모두가 과감하게 사회적 거리 안으로 발을 들이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두껍고 무거운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놓으신 분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첫발을 내어놓으므로 코로나로 인하여 잠시라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제 비가 그쳤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우산을 접었다. 어느새 비가 멎은 맞은편 멀리 하늘가에 작은 푸르름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코로나가 사라진 뒤 우리에게 다가올 희망의 색깔 같은 푸르름이었다. 그 푸르름을 바라보며 나는 아내와 더불어 아까보다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2020. 5월 초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