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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떼뉴의 수상록 그리고 똘레랑스(tolerance)

by 석운 김동찬

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오늘 산우들과 더불어 산행을 했다. 매주 토요일에 오클랜드 근교의 걷기 좋은 등산코스를 찾아 산우들과 더불어 걷는 모임이 있어 가능하면 매주 토요일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이번 주 내내 비가 많이 와서 오늘 산행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오늘 날씨가 좋아서 땅이 좀 질을 것을 각오하고 산행을 감행했다. 오늘 다녀온 곳은 오클랜드 서쪽의 오클랜드 마운틴(Mt.Auckland) 지역의 등산코스였는데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산우들이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 엄청 질긴 했지만 경관도 아름다웠고 날씨도 좋아서 산우들과 더불어서 정담을 나누며 즐거운 산행을 했다. 누군가가 노년의 삶의 지혜 중 하나가 '갈까 말까 망설여질 때에는 가는 것이 좋다, '라고 했는데 오늘 산행도 바로 그 삶의 지혜를 제대로 따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갈까 말까 많이 망설였는데 오늘 아침 과감히 가는 편을 택했기에 산우들도 만나고 또 늦가을 낙엽 뒹굴고 들판 가득히 토이토이의 흰 물결이 술렁이는 경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새삼 오늘 모임을 주선한 산행 리더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이 들고 또 같이 산행을 했던 산우들에게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들었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한 뒤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더니 노곤하고 스르르 잠이 오는 것 같아 책을 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컴퓨터를 켜고 며칠 전 쓰다만 글을 마저 쓰려고파일을 뒤지다가 문득 아주 옛날 이십여 년 전에 이곳 교민 신문에 실었던 글 하나가 눈에 뜨였다. 제목 이특 이해서 혼자서 읽어보다 그때 이런 글을 다 쓴 적이 있었나 하고 혼자 지나간 옛 생각이 나서 웃었다.


요즈음 웬일인지 도저히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아 짧은 글 하나도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해서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카페에 글을 올린 지도 꽤 오래되어서 무슨 글이라도 하나 올려야 할 터인데 하는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오늘 우연히 만난 이 글을 읽고서는 비록 오래전 썼던 글이지만 그냥 아쉬운 대로 나를 아는 분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에 카페에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이십여 년 전을 회상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떼뉴(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의 수상록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프랑스에 한 귀인이 있었습니다. 이 귀인은 모든 면에서 귀하고 고상 한 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코를 풀 때만은 맨손을 이용하여 땅에다가 풀어버리므로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맨손으로 코를 푼다는 것은 천인들이나 하는 짓이었기에 이를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에게 왜 헝겊(당시에는 아직 휴지가 생산되지 않던 시절입니다)을 이용하지 않고 더럽게 손을 이용하느냐고 충고하자 이 귀인이 대답하기를, “콧물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것이기에 부드러운 귀한 천에 싸서 보물처럼 주머니 속에 간직하는가(코를 푼 천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빨아서 다시 사용하는 것을 말함)? 내 생각에는 코와 같은 것은 손을 이용해 바깥에 직접 풀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보네”라고 했답니다. 몽떼뉴도 이 귀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그의 수상록에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친김에 이번에는 제가 어렸을 때 뵙던 제 아버님의 친구 분의 이야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이 분은 대단한 애연가 시라 항상 입에서 담배를 떼어놓지 않는 분인데 화장실에 갈 때만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담배 피우시는 분들은 다른 때는 안 피더라도 화장실에 갈 때만은 일부러 라도 담배를 찾아서 피워 물고 가는 것이 보통이고 또한 저희 아버님도 그러셨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던 시절이라 담배를 잘 안 피우는 분이라도 화장실 냄새를 잊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담배를 피워 물고 화장실에 가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친구 분의 이러한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신 저희 아버님이 친구 분에게 자네는 담배를 그리 즐기면서 어째서 화장실에 갈 때만은 일부러 끄고 가는가 라고 묻자 그 친구 분이, “이 사람아, 나는 담배를 기호식품의 하나라고 생각하네. 우리가 담배를 피운다라고도 하지만 흔히 먹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담배가 식품의 하나라는 증거 아닌가? 어떻게 아무리 배가 고파도 화장실에서 먹는 짓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화장실에서는 담배를 안 먹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어린 생각에도 그분의 말씀에 수긍이 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똑같은 사물이 보는 관점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물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세상은 훨씬 다양하고 재미있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랑스어에 "똘레랑스(tolera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한마디로 번역하기는 힘들지만 그 뜻은 관용, 용인, 풀어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행동 및 사고방식을 인정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서구 사회 중에도 프랑스가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에서 그렇게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면서 서로 화합하며 조화를 이루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근본 이유가 프랑스 사람들이 바로 이 ‘똘레랑스’의 정신을 잊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토론은 해도 다투지는 않고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되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다른 것은 의견이며 관점이지 의견이나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적으로 만들지 않고 여전히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 ‘똘레랑스’의 정신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 한 가지로 어제까지의 친구를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낙인을 찍어 버려 끝내는 감옥으로까지 보내고야 심성이 풀리는 우리의 정치판을 보면 왜 유독 한국사회에서 정치판만은 그렇게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나 하는 답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것이 다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똘레랑스’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몽떼뉴가 내놓은 유명한 표어의 하나가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모르는 것을 상대방은 알 수 있고 상대방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고 해서 그를 미워하거나 무시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Que sais-je(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스스로의 삶과 앎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뿐더러 더욱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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