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하이네의 '어디'와 석운(夕雲)의 '그대를 보내며'
어디?
하인리히 하이네(1779~1856)
어디가 방랑으로 지친 이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것인가?
남쪽의 야자나무 아래일까?
라인 강변의 보리수 아래일까?
나는 황야 어디에
낯선 이의 손에 의해 묻힐까?
아니면 어느 바닷가의 모래 속에서
쉬게 될까?
아무러나! 여기서나 거기서나
하느님의 하늘이 나를 감쌀 것이며,
죽은 자를 위한 등불처럼
밤엔 별들이 내 위에 떠다니리라.
Wo?
Heinrich Heine
Wo wird einst des Wandermüden
Letzte Ruhestätte sein?
Unter Palmen in dem Süden?
Unter Linden an dem Rhein?
Werd ich wo in einer Wüste
Eingescharrt von fremder Hand?
Oder ruh ich an der Küste
Eines Meeres in dem Sand?
Immerhin! Mich wird umgeben
Gotteshimmel, dort wie hier,
Und als Totenlampen schweben
Nachts die Sterne über mir.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로렐라이‘, ‘노래의 날개 위에‘와 같은 아름다운 시로 우리가 서정시인으로 생각하는 하인리히 하이네는 실제로는 평생 자유를 추구하며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그는 1830년 프랑스의 혁명에 감동하여 파리로 이주한 뒤 독일과 프랑스의 언론에 사회와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써서 언론인의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독일의 미움을 받아 추방당해 계속 파리에 머물렀습니다. 말년에 그는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며 그 스스로 ‘침상은 나의 무덤, 방은 나의 관(棺)‘이라고 불렀던 ‘침대 무덤‘에 갇혀 글을 쓰며 살다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었고 이 시는 그의 묘비에 적혀 있는 시입니다.
한평생 자유롭게 마음껏 떠돌며 자유를 구가하며 살았지만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이 가까워져 오는 것을 느꼈을 때엔 하이네도 죽으면 어디에 묻힐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평생에 걸친 방랑에 지쳤기에 죽은 뒤엔 편안히 쉬고 싶어 어디가 좋은 안식처가 될지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첫 연의 ‘남쪽의 야자나무 아래’와 ‘라인 강변의 보리수 아래’는 대조적입니다. 죽음이 가까웠지만 아직도 방랑벽은 남아서 이국의 ‘야자나무 아래’가 좋을 것도 같고 아니면 죽은 뒤에는 고향으로 가서 ‘라인 강변의 보리수 아래’에 안식하는 것이 좋을까 갈등합니다.
둘째 연에서는 방랑자의 신세인 자기가 낯선 땅에서의 죽음이라 낯선 손에 의해 황야나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묻혀 제대로 안식도 못 하게 되지 않나 걱정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연에서 하이네는 자유로운 영혼의 본연의 자세를 되찾습니다. 묻힌 곳이 어디든 하느님의 하늘이 감싸고 밤엔 별들이 위에서 떠 있으면 그곳이 곧 안식처이기에 자신의 죽음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고백하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장자(莊子)의 죽음이 생각납니다.
장자(莊子)가 임종할 때가 되자 제자(弟子)들이 장사(葬事)를 후하게 치를 계획을 했습니다. 이를 들은 장자는, "나는 천지로 관(棺)을 삼고, 일월(日月)로 연벽(連璧)을, 성신(星辰)으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이 조상객(弔喪客)이니 모든 것이 다 구비되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말하면서 그 의논을 즉시 중단하게 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놀라서 매장을 소홀히 하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속의 벌레와 개미의 밥이 된다.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준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장자의 잡편(雜篇) 중 '열어구(列禦寇)
하이네가 장자를 읽었는지 모르지만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생각도 서로 비슷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장자는 죽은 뒤 관(棺)도 필요 없다고 했고 하이네는 아무 곳에 묻혀도 상관없다는 시를 썼을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다른 시 한 편 더 보겠습니다.
그대를 보내며 (91년 여름 故 金敎授의 靈前에 바쳐)
석운(夕雲)
어제는 그대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며
삶과 예술(藝術)의 그윽한 뜻을 논하였는데
오늘 그대는 차디찬 껍질로 누웠고
떨리는 손길 불 그어 향(香) 겨우 사르고
나 또한 그대 앞에 껍질로 앉았네
벗이여
죽음은 늘상 우리의 화두였지만
지금 돌연 죽음 속으로 들어간 그대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 그대인가
그대를 받아들인 것이 죽음인가
울며 몸부림치는 그대 가족들의 슬픔 앞에
눈물이 치솟고 오장(五臟)이 터져나가도
벗이여 나는 그대를 슬픔으로 조상(弔喪)할 수 없네
내 앞에 누워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고
고작 그대의 비어 있는 껍질에 불과하기에
일어서 등 돌려 나 이제 나가네
누워있는 껍질의 그대도 떨치고
앉아있는 껍질의 나도 떨치고
죽음을 슬퍼하는 모든 이에게 우리의 껍질일랑 모두 맡기고
어딘가 살아있을 진정한 그대를 만나러
나 이제 나가네
김 교수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친구입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지만 6월이 되어 비가 자주 내리면 그 친구 생각이 나서 새삼 가슴이 아픕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무척 많이 내리던 6월의 어느 날 저녁 김 교수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문병을 가다 사고를 당해 바로 그 병원의 영안실에 안치됐으니 참으로 운명이란 얄궂기만 합니다.
영안실에 가서 그의 영정 앞에 섰을 때 참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어제까지 그와 만나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했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차마 용기가 없어 그의 부인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를 짓누르는 무력감과 자괴감과 슬픔에 영안실 바닥만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해맑은 웃음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직이 내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형, 그러지 말아요. 난 여기서 아주 편해요. 웃어요, 날 위해서, 그리고 내 집사람을 위해서!’
하지만 난 웃지 못했습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의 눈길이 던지는 시선과 환청처럼 귓가로 들려오는 그의 속삭임을 한참이나 듣고 있다가 터져 나오는 오열을 입안 하나 가득 물고 돌아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비 오는 밤거리를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비를 흠뻑 맞으며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를 곱씹고 곱씹으며 걷다가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맘껏 퍼마시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 앞에 다가가 쓴 시가 위의 시입니다.
2025년 5월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