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안개
며칠 전 모처럼 이른 아침에 골프를 쳤다. 서둘러 간단한 아침을 먹고 아내와 더불어 집에서 가까운 골프장을 향했다. 오늘 안개가 굉장하네요 하고 옆자리의 아내가 똑바로 앞을 보면서 말했다. 멋있어요. 일찍 나오니까 이런 광경을 다 볼 수 있네요 하며 아내는 자욱이 안개 낀 거리의 풍경을 다분히 즐기는 표정이었다.
같이 골프를 치기로 한 친구 부부는 이미 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안개가 제법 꼈네. 공이 제대로 보일지 모르겠어 하며 친구가 안개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해가 나오면 곧 걷힐 걸세. 참 오랜만에 안개 속에서 공을 치겠는데 하고 나도 안개 이야기로 그의 말에 답했다.
서로 준비가 끝나 1번 티 그라운드에 올라서자 저만치 앞에 먼저 나간 팀이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반투명 유리 너머의 실루엣처럼 아스라하게 보였다. 페어웨이 양 쪽에 서있는 크고 작은 가을 나무들의 모습이 신기루 속에 잠깐 모습을 드러낸 허상인 양 안개에 잠겨있었다.
그때,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가을에 속리산으로 과여행(科旅行)을 갔었다. 남학생 여학생 몇 명이 어울려 떠난 여행은 즐겁기만 했고 2박3일의 여정은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감수성이 무척이나 강하고 예민했던 그때 집을 벗어나 여행을 한다는 것부터 가슴 뿌듯한 일이었고 가을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속리산 산길을 여학생들과 같이 오르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숙소인 여관에서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들은 모두 여관집 대청마루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여관집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있었다. 어머 저 노래 너무 좋아요 하고 여학생 하나가 말했다. 그러자 그 옆의 여학생도 나도 저 노래 너무 좋아해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 모두는 이야기를 멈추고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아 아아아아----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청순하고도 애절한 목소리가 가슴속으로 스며들었고 곡조도 가사도 대학교 1학년인 우리 모두의 젊은 감성을 촉촉이 적시는 아릿한 슬픔을 띠고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좋지요? 저 여자 가수가 이제 겨우 17살이래요. 우리보다도 어려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슬프게 노래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맨 처음 노래를 듣고 탄성을 올렸던 여학생이 말했다.
가요를 잘 모르던 나도 그때부터 ‘안개’라는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 노래를 불렀던 정훈희라는 여가수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에 내려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그녀의 노래 모음을 담은 CD를 선뜻 사가지고 온 이유도 그런 추억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 1번 티 그라운드에 올라서 안개 속에 잠긴 골프장 전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오십 년 전 그때의 추억 속으로 잠겨 들었고 골프를 치면서도 입 속으로는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하며 안개 노래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 뭘 그리 생각해. 자네 칠 차례야. 빨리 치게 하는 친구의 채근도 몇 번이나 받으며 겨우 골프를 끝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돌아와 시를 한 편 썼다.
안개
안개 속의 정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휘장 너머의 여인들이 모두 미인이듯이
작은 물방울의 입자들이 모여 공중에 떠다니면 안개가 되지만
시간의 작은 입자들이 모여 머릿속을 떠다니면 추억이 된다
그리고 추억 속의 정경들은 모두 정겹기만 하다
나이가 들면 눈에 안개가 낀다
전만큼 세상을 잘 볼 수는 없어도
전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어 고맙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머릿속에 안개가 낀다
전만큼 기억력이 좋지는 않지만
전보다 쉽게 놓아줄 수 있어 편하기도 하다
들판에 안개가 자욱한 이 아침
온몸으로 안개를 맞으며 안개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들어와 내 안으로
누구라도 무어라도 나는 마다하지 않아
잠깐이야 그냥 잠깐
태양이 뜨면 나는 가야 돼
흔적도 없이 그냥 가
모두 놓고
안개는 내 몸을 감싸며 빠져나가고
텅 빈 들판에서 나는 내 삶의 안개 속으로 빠져든다
그때 동쪽 하늘에서 희끄무레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나는 놀라 소리친다
태양아 태양아 이 아침엔 좀 늦게 떠오를 수 없겠니
나는 아직도 이 안개와 더불어 할 말이 너무도 많구나
2017.6.8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