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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딘 Mar 26. 2024

부모앓이 1

[ 사는 게 투덜거림 2 ]

 어제는 종일 심란했습니다. 고1 올라간 딸에게 남친이 생겼더군요. 어른들의 욕심이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고등학교 때 바짝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거요.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대한민국은 학벌사회, 계급사회잖아요. 좋은 대학 가서 좋은 회사 들어가면, 그게 효도잖아요. 그런 소박한(?) 바람이 무색하게,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모양입니다. 고1 첫 번째 시험이 3년을 좌우한다는 부모의 말은, 그에겐 한낱 잔소리였나 봅니다.


 게다가 요즘 애들 좀 무섭나요. '플라토닉 러브' 같은 건 '쉰 내'가 난다나요. 손 끝에서 몸 끝까지 닿는데 며칠 안 걸리죠. 달콤한 꿈 뒤에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감도 못 잡는 주제에 말입니다. 가해자보단 피해자의 입장부터 떠오르니, 한숨이 납니다. 우리 애가 그 정도로 멍청하지만은 않길 바랄 밖에요.


 아침 퇴근길, 해가 밝게 떴는데 빗방울이 흩날립니다. 괴상하다. 꼭 내 마음 같네. 입춘은 지나친 지 오랜데, 바람은 아직 겨울에 묶여 있나 봅니다. 옷을 너무 얇게 입었나, 집사람 이야기 들을 걸. 성급한 자신을 자책하며,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습니다. 


 참 저는 교대근무를 합니다. 4일마다 한 번씩 떠오르는 해를 보며 퇴근하죠. 막 깨어난 도시를 걷는 건 서늘하지만 상쾌하답니다. 게다가 퇴근길이니 오죽 좋겠습니까. 회사 앞 커다란 공원을 지날 땐, 참새들의 기지개 소리마저 흥겹죠. 요상한 날씨 때문인가, 아님 제 기분 탓인가, 오늘은 다들 어디 숨었는지 새 뼈다귀 같은 나무들만 가득하군요.


 학창 시절 늘 조심했습니다. 사고 치지 않으려고요. 허락되지 않는 건 하지 않으려고요. 범생이라 그런 게 아니라, 책임져 줄 사람이 없었거든요. '불행 팔이' 좋아하진 않지만, 그곳이 제가 자란 땅이니 어쩌겠습니까. 내가 여기서 사고 치면 막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꽤나 일찍 알았습니다. 박스 모아 파는 할머니에게 무슨 하소연을 하겠습니까. 여담이지만 이제 보니 할머니는 트렌드를 앞서 가셨군요. 그게 벌써 30년 전이거든요.


 복도에서 빗자루로 칼싸움을 하다가도 행여 유리창이라도 깰까 멈췄습니다. 양아치 무리에 끌려가 화장실에서 두들겨 맞은 날도 외로이 삭혔습니다. 말해 뭐 합니까. 글자도 못 읽어 버스도 못 타는 분인데, 학교로 찾아 올 수나 있겠습니까. 공업 고등학교로 진학을 결정하는 일도 오롯이 제 몫이었죠. 선생님은 안타까워하셨지만, 대학교는 제 눈에는 언감생심이었죠. 뭐 돌고 돌아 결국 학사모를 쓰기는 했지만요.


[ image by Piyapong Saydaung from pixabay ]


 버스에서 내려 동내 치과를 가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책임감의 문제구나. 딸아이 이성친구가 눈에 거슬리는 건, 그의 무책임함 때문이구나. 본인의 남친 문제로 가족들이 입을 상처는 안중에도 없구나. 그래서 화가 났나 봅니다. 심란했나 봅니다. 늘 본인은 저지르기만 하고 뒷수습은 부모가 해주니, 거기에 적응이라도 한 걸까요. 책임감이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는 그의 행동이, 일찍부터 책임감으로 살아온 제겐 받아들이기 어려웠나 봅니다.


 쑤시는 잇몸을 혀로 문지르며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봄 볕이 눈 부시게 쏟아지는군요. 봄이다, 감탄이 절로 새 나옵니다. 몸이 하나 둘 망가지기 전엔 안 보이던 것들입니다. 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들어 좋은 점도 있군요. 곧 저 앙상한 가지에도 각각의 봄이 돋아나겠죠.


 반짝이는 봄 볕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봄이 왔으면 봄이나 보자고요. 찌질한 나는 이미 없고, 불행한 아이는 아직 없는데, 난 뭐를 보고 있는 걸까요. 만나는 모든 것을 죽이라던 임제스님의 가르침은, 그저 머리에만 남은 걸까요. 아이 얼굴을 보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서운할지도, 나무랄지도, 대범한 척 농담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지금은 좀 걸으렵니다.

 봄 볕이 따스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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