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영화 좋아해요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그것에 미.쳐.야. 하는 시대. "저 영화 좋아해요."라는 말에 대책 없는 무게감이 실리는 게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최근 몇 년인지라 "00 영화도 안 봤어?"라는 말을 들은 게 부지기수다. 그때그때 개봉하는 블록버스터 기대작들이야 가끔씩 챙겨봤다지만, 그 사이사이마다 끼어있는 '숨은 명작'은 레이더망에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굳이 예를 들자면 마블의 전성기 때 <어벤저스 시리즈>는 다 섭렵했지만, 영화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히치콕의 작품에는 손도 대지 않은 정도랄까.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하며 작가주의 영화에도 눈을 뜨게 되었고, 시네필(Cinephile)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하지만 영화는 분명 좋아하는, 애매필(Amaephile)이 되었다.
애매필: 시네필과 영알못, 그 사이 어딘가의 존재 (출처: X@tngeverywhere)
*속옷 브랜드 아님
마침 책과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는 독서모임원 분들과 왓챠피디아 친구를 트기도 하고, 차곡차곡 나만의 라이브러리를 쌓아갔다. 그렇게 지난 2~3년 간 약 380편의 영화 및 드라마 시리즈를 보았다. (별점과 한줄평을 매기는 이동진 평론가 놀이도 하고 있다) 예전 모임에서 하루에 한편씩 영화를 본다는 CGV VVIP를 뵌 적이 있는데, 그 아성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이 정도면 "저 영화 좋아해요."라는 말을 조심스레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쓰기 어려운 건 단순히 '영화를 많이 본다'는 걸 넘어, 그 안에 전제된 전문성이나 예술성, 힙스러움(?)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선민의식까지도 덧칠하니 더욱 무거운 타이틀이 되었다. 유럽 영화, 희귀 영화, 고전 영화, 작가주의 영화로 대변되는 이들의 취향은 일견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 왠지 그 앞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영화 좋지 않아요?"라는 말 따위를 내뱉었다가는, 누벨바그(내가 아는 제일 어려운 영화 용어)니 하는 바게트 냄새 가득한 용어들로 혼쭐이 날 것만 같다.
애매필에게도 할 말은 있다. <아바타> 시리즈의 압도적 CG 앞에서 입을 벌리다가도, 라스 폰 트리에의 과시적 연출에 눈을 반짝이기도 하니까. 거장들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나름 마이너한 최고작을 꼽을 수도 있고, 픽사의 전성기를 누구보다 그리워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지극히 주관적인, 이번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