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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Jul 19. 2020

비건으로 한 달 살기 : prologue

Super size me, 2004 




어릴 때부터 나는 고기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바다 동네 출신이어서 우리 집 식탁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생선이 올라왔고 

나와 누나를 위한 고기반찬이 있었을 뿐 두 분은 고기를 즐기지 않으셨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다른 평범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육식을 즐겼다. 

돼지국밥이나 순대 같은 음식들은 때가 되면 의식처럼 먹어야 할 만큼 좋아하는 메뉴였고 

유제품과 버터가 들어간 디저트들은 살아가는 소소한 즐거움이라 할 만큼 소중했다. 

물론 치킨은 언제나 고된 하루의 보상심리를 채워주는 단골 주자였다.  


지속가능성과 환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식탁 위의 육식 이면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지만 

잠깐 동안의 안타까움과 죄책감뿐이었다. 

여전히 다음 날 또는 몇 시간 뒤에 나는 식탁에서 고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지속가능성을 모토로 한 레스토랑을 오픈하게 되면서 

운 좋게도 대한민국에 1%도 되지 않는 자연 축산 농가들과 동물복지 농가와 같은 곳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공존과 공생을 고민하시는 분들과 습성을 드러내고 감정을 표현하는 동물들을 만났다. 

그곳에는 사람도 동물도 선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공장식 축산, 동물복지, 마블링과 등급제, 유기축산, 남획과 혼획, 자연방목, 유전자 변형 연어, GMO사료와 항생제, 축산폐기물과 양식장으로 인한 환경오염, 종 다양성, AI와 구제역... 

몇 년 간 축산업, 양식업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과 영상, 책, 영화를 보면서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정도의 정보들이 머릿속에 가득해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안들을 바라보게 되었을 뿐

육식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고기가 전혀 없는 삶을 이따금씩 상상해보았지만 너무 멀고 어려운 일로 보였다. 

그래도 딜레마가 생겼다는 것은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최소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른척하고 지나칠 수는 없게 된 것 같았다. 




아주 최근에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식재료는 물론 모든 포장용기의 소재에 이르기까지 환경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밀키트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다. 

이 회사의 주력 상품은 비건 밀키트이다. 

'논비건도 비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매력적인 비건 메뉴를 만든다.'를 목표로 하고 있다. 



때가 온 것 같았다.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비건으로 한 달 살기'를 

실천해보기로 했다. 6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 밤이었으니 말나온 김에 7월부터 해보자 다짐했다. 

이게 뭐 대단한 출사표라도 되는 건지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뭔가로 한 달 살기라는 걸 해보게 될 일이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게 비건으로 한 달 살기가 될 줄이야. 


몇 년 전부터는 고기로 과식을 하게 되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소화제를 먹거나 

다음날 오전까지 속이 더부룩한 일이 많았는데 빨리 먹고 과식하는 습관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이 참에 그 멍청한 무한반복도 잠깐 멈출 수 있겠구나 싶었고,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나 약간의 지방간 소견과 같은 내 나이대의 많은 사람들이 친구처럼 함께 가지고 있다는

자잘한 질환들이나 피부 트러블 같은 것들에는 변화가 있을 지도 궁금했다. 

마치 다른 의미의 'Super size me (2004년 영화)' 같은 실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메뉴 개발에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각종 제약으로 가득한 상황 속에 밀어 넣으면 나름의 생존법 모색하게 될 것이다. 

고기 없이는 살 수 있을 듯해도 맛없는 것만 먹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위인인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건투를 빌어본다. 



6월의 마지막 날에 '비건으로 한 달 살기' 프로텍트를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건 금연할 때처럼 주위의 양해와 도움을 요청함과 동시에 대중 선언을 통해 자신과의 약속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작업이다.  


당신이라면 무난히 해낼 것이다. 난관이 예상된다. 응원한다. 도대체 왜 하느냐 등

지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여러 가지 진중한 반응들을 보였다. 


'당신의 삶은 도전의 연속인 삶인 듯하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써놓고 보니 이 글 안에 있는 내용만으로도 그러하다. 

글쎄.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만들면서 삶의 치열함을 만들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잠시 작별할 육식인으로서의 마지막 날. 

어느 때보다도 신중한 결정을 내리고 혼자 초밥을 먹으러 갔다. 

이로써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가능할 것 같다. 


고기와 생선 중 남은 인생에서 한 가지를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건 나에게 고기인 것이다. 


한 달 뒤의 나의 정신세계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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