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 대신, 기록을 선택한 어느 여름
교회 청소년 수련회를 다녀온 뒤, 아이는 본격적인 방학에 들어갔다.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집에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나는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수련회를 다녀온 뒤, 문득 과거 내 막연한 불안감이나 불신이 되려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수련회에서 만난 고등학교 2학년 아이가 자신의 우울했던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줘서일 수도 있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 친구 관계로 인해 방 안에서만 틀어박혀 게임만 했었다고 고백했다. 앞머리도 자르지 않고 우울하게 말이다. 우리집 중딩이 생각났는데, 이건 어쩌면 정말 어느 하나의 통과의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급함이 불현듯 찾아왔다가, 다시금 내 불안이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돌아서는 과정이 너무 성급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춘기를 키워낸 부모의 말보다 막 사춘기를 끝낸 고등학생 2학년의 담담한 고백이 나에게는 훨씬 더 깊게 와닿았던 게 사실이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
한편으론 중학생이라는 존재가 참 애매모호하다는 생각했다.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애 취급도 할 수 없는, 하지만 무모하면서 전혀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사나운, 동시에 냄새도 많이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 말이다. 같은 세탁기에서 같은 세제로 빨래를 하는데 왜 아이의 옷에서는 비오는 날의 축사와 비슷한 냄새가 날까.
쓰다 보니 왜 그렇게 소셜미디어에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의 사진과 사랑스러운 스토리가 가득한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중고등학생 되면, 특수 몇몇을 빼고는 그 시기를 공개적으로 기록하기에 꽤 난감한 에피소드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사실 부모 입장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우리 애는 비 오는 날 축사 같은 냄새가 난다고 고백하는 건 솔직히 TMI에 가깝지 않은가.
솔직히 내가 살아온 인생의 관점으로 아이를 바라보자니, 이해되는 점과 동시에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공존한다. 어느 한 쪽만 하면 대응하기가 쉬울텐데, 나의 세계관은 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모순된 채 섞여 있어 늘 어렵다. 그래서 최근 파브르가 곤충을 관찰하듯, 방 안에서 작은 휴대폰 화면만 보고 있는 중학생을 멀찍이 관찰만 하고 있다.
중요한 건, 내가 관찰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제재나 군소리 없이 아이의 행동을 멀리서 바라보고, 이따금씩 떠오르는 잔상을 기록해두고 있다.
방학 첫 주의 발견
방학 첫 월요일, 원래라면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아이는 침대에 누워 행복한 미소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아이도 굳이 문을 닫지 않았다. 그러니 내 책상에서 고개만 돌리면 아이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예전과 달리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고 싶다는 생각은 일단 들지 않았다.
한참을 누워있던 아이는 시계도 보지 않았는데 꽤 규칙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배고프다고 말했다. 움직임이 없어 칼로리 소모도 없을텐데 꼬박꼬박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아이를 신기해하며 밥을 줬다. 그게 전부였다.
침대와 방이 아이에겐 너무 안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문득 저렇게 안락하게 누워있는 아이가 왜 그토록 불안했는지 궁금해졌다.
며칠을 생각했고 어느날 모닝 달리기를 하다 문득, 나는 아이가 최고가 되길 바라는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는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대에 누워 작은 화면만 바라보는 아이가 몇 년 후, 그 반복된 모습 끝에 불행의 치를 떨고 있는 어른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TV나 영화 속에서처럼,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며 무기력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가 생겨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 지, 방법 자체를 몰라 좌절하는 모습.
내가 불안했던 건, 바로 그런 미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신기한 건, 내 머릿속에는 그토록 불길한 상상이 가득했음에도 아이의 표정은 그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아이는 마치 천국에 있는 사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노래도 없는데 발가락으로 리듬을 타듯 까닥까닥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 가득한 불행한 미래와, 아이의 몸으로 살아내는 행복한 현재. 이 미스매치는 어디서 온 걸까?
나의 불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불행을 상상하는 데서 온다. 하지만 지금, 당장 미래는 커녕 몇 시간 뒤 가야 할 학원 시간도 잊은 채, 충만하고 충실하게 휴대폰을 보고 있는 아이. 과연 누가 더 지금을 살고 있는 걸까?
의정부미술도서관에서의 실험
며칠 뒤, 아이가 너무 집에만 있는 것 같아 큰맘을 먹고 의정부미술도서관을 가자고 제안했다.
사진으로 봤던 그 공간은 실제로 더 멋졌다. 웅장했고, 마치 외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은 나에게 ‘쾌적한 공간’이었다. 공기가 너무 세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마치 편백나무 향을 쏙 뺀 숲속 공기처럼 상쾌하고 편안했다.
나는 기분이 금세 좋아졌고, 책을 펼치기 전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멋진 공간 한구석에, 외출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아이가 여전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신기했다. 1층부터 4층까지 뻥 뚫린 광활한 층고를 앞에 두고 그 작은 화면에만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 순수하게 궁금했다. 아마 최근 읽고 있던 《사람을 안다는 것》에서 말한 "적극적인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배고프면 말해”라고만 남기고 나는 책에 집중했다. 약 두 시간이 흐르고 고개를 돌리니, 아이는 여전히 같은 의자, 같은 자세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시력보다 거북목이 더 걱정되는 자세였다. 하지만 “자세 똑바로 해”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던 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의정부 부대찌개나 드시러 가시죠?”
아이는 실없이 피식 웃더니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관찰의 중간 결론
중학생의 세계관은 정확히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중학생 첫 여름방학에 막연한 나의 불안감이나 불신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는 그런 마음이다. 정답은 없겠지만, 부대찌개를 먹으러 가자는 제안에 "이 판만 끝내고"라고 말하지 않고 즉각 따라나선 점이 꽤 고무적이다.
앞으로 2주가 더 남았다. 언제든지 내 불신과 불안이 아이를 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를...
P.S.
방학 후 군소리 없이 지켜만 보던 어느 날, 아이가 조용히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아이씨... 이것만 하고 꺼야지. 숙제해야 하는데..."
나는 그제서야 그간 내 불안에 아이가 의지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내 잔소리 없이도 자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육아르포르타쥬 1.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