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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ryblack Apr 09. 2021

[SF영화] 인터스텔라가 지구를 다루는 방식

스피노자로 보는 인터스텔라, 과학에 대한 이야기인가 신에 대한 이야기인가



스피노자의 생애를 다룬 책을 읽다가 번뜩 어떤 생각이 떠올라 잠시 책을 내려놓고 글을 쓴다.

(책이 지루해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먼저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이게 바로 소확행이지."라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관을 걸어 나왔다.

영화 속 지구는 아름답게 그려졌고, 신들린 재즈 연주 또한 완벽했다. 하지만 인간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다면, 왜 자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소울' 제작자들은 자살 천국 대한민국에 와서 인생의 '처절함'까지 연구하고 이를 애니메이션에 반영해서 이 세상이 더 완벽한 '살만한 세상'임을 입증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영어를 할 줄 몰라서, 메일을 보내지 못했다는 기억은 잠시 접어두고, 이전에 본 적 없던 '소울'에서 그려낸 세계관에 대해서 잠시 짚고 싶다.

 

애니메이션 '소울', 20일 개봉[사진=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소울'의 세계관은 현실과 사후세계로 분리되어 있고 (이어지는 부분도 있다)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존재들이 나온다. 이 존재들은 스스로를 '양자물리학적으로' 4차원 이상의 차원에 존재하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인간 '소울'들에게 보이기 위해 시각화되었다 설명한다.

 종교적 세계관으로 이해되기 쉬운 사후 세계를 지옥이나 천국으로 가르지 않고, ‘테리' 등의 '어떤 존재'들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통해 목적론적 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설정한 노력이 가상하고 세계관 설정이 ‘삶에게 정해진 목적은 없다’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며 친구와 흥미롭게 얘기 나눴다.


 많은 영화들이 인간의 심리적 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신'이나 '사후세계'를 드러내는 세계관과 보편성과 진리를 탐구하는 목적론적 서구 철학의 세계관, 혹은 그 신을 대체한 과학, 정신분석학 등을 차용하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특히  SF영화는 과학이 발달한 미래의 디스토피아;라는 배경을 설정하면서 이 같은 철학적 세계관을 심어 놓고, 그 안에 배치된 캐릭터가 과학적 시도를 통해 '인간의 한계', ‘기존의 세계관’을 뛰어넘는 스토리를 통해 감독이 의도하는 주제를 전달하기도 한다.




 예로 들면 인터스텔라가 그렇다.

인터스텔라는 환경오염이 심각해진 디스토피아적 미래시대를 배경으로,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정도의 사막화와 모래 태풍에 매년 농작물 생산이 불가능해져 식재료를 구하기 힘들고, 인간이 더 이상 살기 힘든 지구행성을 그려낸다.



 이때, 어떤 중첩된 우연들은 주인공을 NASA로 이끌고, 주인공은 우주로 쏘아 올려져, 누군가가 열어놓은 웜홀을 통해 새로운 은하계로 여행을 떠난다.

주인공 팀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적합한 환경을 가진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 다니다가 결국 지구에 돌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블랙홀을 이용한 시간/공간 여행을 시도한다. 이때, 주인공은 블랙홀 밖 쪽의 누군가 준비해준 큐브(딸의 방으로 연결된)로 튕겨 들어가, 딸에게 블랙홀 안쪽의 수렴된 값을 읽어서 전달해준다.

 딸은 귀신같이 말을 걸어오던 모든 우연들이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가 보낸 블랙홀 수렴 값을 전달받아, 대입하여 풀리지 않던 물리법칙을 풀어내고 새 우주시설을 신설하여 식량위기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



  우주여행 속 어려움들은 부성을 가진 백인 남성 주인공의 '아메리칸 리더십'에 의해 주도적으로 해결된다. 주인공과 그 팀들이 과학적 사고를 통해 고난들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딸이 물리법칙 계산을 통해 우주 속 인간이 살기 좋은 공간을 만들어내기까지 도달하는 모습은 '과학을 통한 성취'로 읽힌다. 그리고 영화는 과학의 진취와 인류의 밝은 미래를 그리며 끝난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가장 무거운 질문은 '살기 좋은 행성을 찾아 지구에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지구로  돌아간다'는, 애초에 불가능한 플랜 A와 '지구의 사람들을 버리고 인간 배아들이 살 수 있는 곳을 찾겠다'는 플랜 B의 간극이며, 이는 일면 여태 우를 범하기만 한 지구의 인류에게 '희망' 혹은 '죽음'만이 남아있는 선택임을 암시하듯 긴장감을 유도한다. 하지만 결국, 이 선택지를 깨고 가족 간의 사랑을 통해 지구적 재난을 극복하며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암시하는 플롯을 갖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그리고 세대 간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기승전결 완벽하고 세계적인 물리학자 킵 손의 검증도 받아 과학적으로도 완벽한 영화다. 하지만 필자는 계속해서 찜찜함이 은근하게 남아있음을 느꼈다. 바로  은하 간 여행이 가능하도록 한 어떤 존재가 누구냐는 것이었으며,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따란~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장치로 나타난 이 존재가 있는데 과연 과학의 진취에 대한 영화일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이 어떤 존재를 미래의 인류라고 부른다. 아주 먼 미래까지 우주에서 생존한 인류가 4차원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 멸종위기에 처한 과거의 인류를 구원해준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의해서 말 그대로 '끝장'나고 있는 지금의 지구를 떠올리며 영화를 본다면, 왠지 이 미래의 인류라는 존재를 구상한 그 시작점이 '신의 보호’를 믿는 인간의 기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감히 이 영화의 주제는 사실 '신'에 대한 기도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현실은 이렇다. 우리는 실제로 이 지구의 중력, 운명에서 한 발짝이라도 옮겨나갈 수 있는 제2의 행성 따위는 찾지 못했다. 영화 속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거나 숨이 막혀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영화 밖 실제 사람들은 기후위기에 따라올 재앙들에 의해 끔찍하게 죽을 것이라는 연구가 이미 보고되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재난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웜홀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그리고 부녀간의 사랑에 감동 먹어줄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꿈꿔보는 것은,

모든 재앙들을 신의 분노에 의함이라고 여기고, 신께서 노여움을 풀어주십사 하고 신에게 기도하던 인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이는 필자에게 기시감을 넘어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기후변화 위기를 겪고 있는 이 시점에 SF 영화 인터스텔라는 인간에게 '지구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거나, '기후위기를 인정하고 스스로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는 어떠한 조그마한 힌트도 주지 않고, 그저 우주선을 '어떤 존재의 영역'으로 쏘아 올린다.

 하지만 물리법칙과 자연법칙의 끝에, 개연성에 물고 물어지는 그 질문의 끝에 결국은 '신의 의지'가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구원을 좇고 기다리다가는, 지구를 부여잡을 시간까지 놓치지 않을까?




다시 스피노자의 책으로 돌아와서, 스피노자는 이 지구의 자연법칙 그 자체가 '신'이라고 말했다. 신은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이며, 그가 목적한 바와 결과물이 분리되지 않는 (지향하지 않는) 완전체이므로, 신과 자연은 분리되어있지 않다.

 스피노자와 같은 시대를 산 당대의 신학자들과 목적론적 사상가들은 신에 대하여 인간 중심적 사고를 유지했고 스피노자 또한 같은 신학자였지만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라며 비판했다.

 그들의 목적론적 사고는 자연을 그저 '신께서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선물한 자원'으로 읽고 싶은 자들에게 이론적 바탕이 되어주었으며, 그 이론을 발판 삼아 기계적 자연, 그리고 (이성과 분리된 노동자의) 기계적 몸을 착취하며 자본주의는 발달했다.


 인간은 그렇게 자연(=신)을 착취하면서도, 자신이 힘들 때마다 '신'을 그렇게 불러재꼈다.

나의 신이 타인의 신보다 위대하시니, 나를 부와 승리에 이끌게 해 달라고.

내가 당신(=신)을 착취한 죄를 사하시고, 새로운 행성을 내려달라고.


 하지만 이제는 '과학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스스로 신이 되어버리신 인간이 다시

 이 지구라는 '신'을 구원할 차례가 아닐까?




 왜 우리는 아직도 환경문제를 다루며 지속 가능한 밝은 미래를 그리는 판타지 영화를 만들지 못할까?


다큐멘터리가 아닌 판타지 영화에서, 어린이 영화에서, 우리가 이 지구에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한 걸까?


이 글을 쓰고 한참 뒤 돈 룩업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인류의 멸종을 가져올 행성 충돌과 죽음에 대하여 우리가 두렵더라도 그 사실을 직시하고 맞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환경문제에 대해 우리가 갖춰야 할 입장을 비유적으로 비춰낸 영화라 생각했고 아주 즐겁고 신선하게 보았다. 물론 해피엔딩은 아니다.


여태껏 '사회의 상상력'을 담당해온 영화라는 분야에서조차 지구에서의 밝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암담한 미래만을 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또 그 영화가 반드시 '채식', '무소유', '자본주의의 한계'를 포함하여 그려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영화 제작자와 영화 소비자 모두 의식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얼마나 암담한지.


+ 개인적으로 인터스텔라를 굉장히 좋아합니다만, 더 현실 기반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논지에서 글을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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