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의 불 앞에서 다시 섭리를 생각하다
책 속에서 마주친 한 문장이다. 최근 AI 시대에 쓰여진 책이 아니라, 1930년대에 쓰여진 <인간과 기계>에 나오는 표현이다.
“인간의 프로메테우스 정신은
인간 자신의 생산물인 기술을 통제하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의 손에 쥐여주던 그 순간부터, 인류의 걸음은 쉼 없이 빨라졌다. 불은 따뜻함이 되었고, 곧 힘이 되었으며, 마침내 지배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불가능을 향한 갈망으로 기술이라는 탑을 하늘 끝까지 쌓아 올렸지만, 그 탑이 드리울 그림자를 끝까지 바라볼 인내는 갖지 못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가속 페달은 집요하게 밟아왔으나, 멈추어 서서 돌아볼 브레이크를 장착하는 일에는 늘 서툴렀다.
그래서 인간은 끝내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피조물을 향한 끝없는 섭리 안에서 완성된다면, 인간의 창조는 정복과 과시, 효율과 욕망의 결과이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만들고, 핵을 만들고, 이제는 AI를 만들었지만, 그것들이 세상과 생명에 남길 상처를 감당할 지혜와 책임에는 쉽게 등을 돌린다. 낳았으되 기를 줄 모르는 부모처럼, 스스로 만들어 낸 존재 앞에서 두려움에 도망친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말이다.
통제 없는 발전은 축복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도박에 가깝다. 만드는 능력은 가졌으나 사랑하는 능력은 갖추지 못한 창조는, 결국 실패로 기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창조주란, 만들어내는 자가 아니라, 만든 것을 끝까지 품고 책임지는 분일 테니까.
우리는 창조주가 되지 못하지만, 창조주의 피조물이다. 인간의 손에서 비롯된 창조는 흔들리고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시작된 우리의 존재는 섭리 안에서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무너진 채로 방치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는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삶은 실패가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시대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섭리 안에 있다. 끝까지 책임지시는 창조주의 손 안에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사진설명: "Reed with Megaphone on Rooftop, New York, New York, 2011" – Photographed by Rodney Smith on his Hasselblad 50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