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간은 '기브 앤 테이크'를 잘한다

오묘 북토크 후기

by 류귀복

토요일 저녁 6시, 작고 아담한 카페에 10여 명이 모였다. 신혼보다 더 달달한 중년 부부와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 딸과 함께 온 어머니, 그리고 브런치 작가와 글쓰기 모임 회원이 함께 했다. 장난감 칼을 들고 온 서아와 서아 엄마도 자리를 지켰다.


오묘의 주인장은 예상보다 더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앞에 앉았고, 진행자가 준비한 질문에 2~3개 정도 답을 했다. 질문지를 사전에 받지 않았기에 말이 계속 겹칠 듯하여, 양해를한 후 한 시간 반을 혼자서 신나게 떠들었다. 이후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Cha향기 작가님이 선물해 주신 예쁜 화분을 들고, 나의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주인장이 내려준 산미가 풍부한 커피를 손에 들고 귀가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하나 더 늘었어."

저녁 9시. 식사도 거르고 귀가하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한 말이다. 이번 북토크는 주연인 나보다 조연들이 더 빛난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너울 작가 부부의 캐미가 청춘 영화처럼 아름다웠다. 미리 도착하여 2권의 책에 사인을 하면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사이 느낀 게 많았다. 글을 쓰는 아내를 위해 함께한 남편이 우리 부부에게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본인은 글을 쓰지 않음에도 아내를 위해 먼 길을 운전해서 온 배우자. 그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했고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함을 깨달았다(그만큼 밝고 다정하다. 게다가 지식인의 풍모도 느껴진다).

나는 출간을 위해서는 저자의 영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나 역시 쓰고 싶은 글 대신 팔리는 글(?)을 쓰며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답 시간이 되었고, 너울 작가의 남편은 내게 "그렇다면 훗날 작가님이 정말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저의 첫 책이 제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훗날 개정판을 낼 수 있도록 계속 최선을 다 할 예정입니다"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딸과 함께 온 어머니가 손을 들고 "저는 작가님 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는데, 여기도 가족이 같이 오시고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게 말씀에서 묻어나네요. 저는 함께 오신 아내분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남편분이 쓰신 글 중에 어떤 글이 가장 좋으셨나요?"라고 물었다.

아내가 질문에 한 답. 그것으로 하루를 투자한 나의 시간은 모두 보상받았고, 더 나아가 3년간 글을 써온 보람을 느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남편의 글은 <시간은 '기브 앤 테이크'를 잘한다>입니다. 내 남자가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러웠어요."


살짝 떨리지만 차분히 답을 하는 아내를 보며 눈물이 살짝 맺혔다. 그 순간, 오묘의 테이블과 의자, 아내가 입은 옷, 경찰 배지를 차고 옆에 앉아 있는 서아, 함께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내게 깊이 각인되었다. 오묘 북토크를 통해 내가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모녀와 함께라면 오묘도 내게는 천국이다




# 시간은 ‘기브 앤 테이크’를 잘한다


오른손에 4잔, 왼손에 4잔, 입에는 물지 않았다. 이 경우 지인을 만나도 피하지 않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다. 평상시 에스컬레이터를 선호하지만 커피 8잔이 담긴 캐리어를 양손에 들고 있는 상황이라 엘리베이터로 이동한다. 2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급박한 상황인데 열림 버튼을 누를 손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발을 사용해야 할 타이밍이다. 문과 문 사이에 30cm 정도 공간이 남았을 때 빠르게 남은 거리를 계산하고 발레리노처럼 오른발을 길게 쭉 뻗는다.

‘철컹’ 하고 성공을 자축하는 벨이 울림과 동시에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뿌듯함도 잠시, 열리는 문틈 사이로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으신 어르신의 뒷모습이 보인다. 반짝이고 세련된 구두를 착용한 그는 적당한 키에, 다부진 어깨, 깔끔하게 빗질된 하얀 머리를 하고 있었다. 70대로 추정되는 그의 손은 엘리베이터의 벽면 버튼 근처에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중저음의 목소리로 “아이고, 미안합니다” 하고 말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것 같다. 하지만 벽면을 향한 몸의 각도로 볼 때 버튼을 누르기 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몸동작은 나를 보고 난 이후 빠르게 닫힘 버튼을 누를 순발력까지는 없어 보였다. 그가 누른 것이 아니라 시간이 되어 닫힌 것이다. 이 상황의 과실을 따진다면 닫히는 문을 다시 열어 그의 시간을 빼앗은 나에게 잘못이 있다. 교통사고로 치면 내 과실이 100프로인 후방충돌 사고다. 그런데 그가 먼저 내게 사과를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상황이 특별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비슷한 상황에서 문을 수동으로 닫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도록 눈길은 피하지 않고 손가락만 길게 뻗어 닫힘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는 사람도 있다. 상대방은 모를 거라고 착각하지만 아니다. 누구나 알 수 있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촉’이라는 감각 때문이다. 하지만 어르신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닫힘 버튼 대신 열림 버튼을 누르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할 줄 아는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촉’이 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나에게 뒤돌아서 한 번 더 “미안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고 인사해 주었다. 살아온 세월만큼 배려가 몸에 깊숙이 배어있는 듯한 행동이다. 긴 세월은 그의 빠른 판단과 즉각적인 행동 능력은 빼앗아 갔지만 대신 그보다 더 소중한 인자와 배려를 보상으로 준 것 같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단 3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르신은 뒷모습만으로 나에게 ‘신사’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그의 말과 행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깊이가 더해진 품격으로 전달되었다. 입에 커피를 물고 있지 않아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정중히 90도로 몸을 숙여 인사할 수 있음이 감사할 정도였다. 따뜻한 커피보다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힘든 하루를 지탱하는데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민등록번호 앞에 적힌 2자리 숫자가 낮다는 이유로,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존중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병원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는 그 욕구가 더 커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존중은 강요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상대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는 행동이 있을 때 존중은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것이다.

때마침(?) 대학 졸업한 딸이 있는 50대 팀장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며 60대 병원장의 이름을 함부로 호명하는 특권의식을 가진 명예교수가 들어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도 아닌데 사용하고 있는 호칭은 늘 30여 년 전 그가 이곳에서 의사로서 가장 명예로웠던 순간에 머물러 있다. 그의 욕심과는 다르게 명예는 이제 호칭에만 남아있는 듯하다. 누군가와 같은 70년 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존중은 남을 존중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내 행동의 그림자 같은 존재’ 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 어르신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

시간은 ‘기브 앤 테이크’를 잘한다. 우리에게서 늘 소중한 것들을 가져가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것들로 채워준다. 가져가는 순서는 랜덤이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먼저 가져가는 경우도 있고, 가장 마지막에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이후 그 빈자리를 더 소중한 것으로 채우는 것이나 그대로 비워두는 것, 아니면 가치 없는 것들로 의미 없이 채우기만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만약 내게 중증 난치 질환을 진단받기 전인 건강한 20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 티켓이 한 장 주어진다면 어떨까? 아마도 나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는 시간이 내게서 가져간 건강은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소중한 딸이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아름다운 과거도 현재만은 못하다. 과거가 더 아름다운 사람은 그보다 충분히 더 아름다울 수 있는 현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현재를 만드는 건 개인의 선택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타임머신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중 하나가 되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행복으로 가득 채워진 오늘을 아름답게 가꿔나가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사용했으면 한다. 물론 아픔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 아픔까지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이자 삶의 원동력이 된다.

-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의 2부 마지막 에피소드. 아내가 읽은 초고.



"다음 북토크 작가님 추천해 드릴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작가님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라고 답하는 오묘 주인장을 보며, 지난 2년간 브런치에서 지내 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아름답게 펼쳐졌다. 후기가 길었다. 오묘 북토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여서 행복했다.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작성했습니다. 이 글은 한 주 후에 삭제할 예정이라 부득이 댓글 창을 닫습니다. 감상평(?)을 이전 글에 남겨 주시는 건 당연히 환영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