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는 어느 낯선 우주선 안에서 정신을 차린다. 우주선에서 함께 동면중이던 동료 선원들은 이미 서늘한 시신이 되어 있고, 홀로 남겨진 그레이스는 이내 곧 자신이 태양계가 아니라 훨씬 먼 타우세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우주선에 적응하며 자신의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하나하나 맞춰나간다.
죽어가는 태양. 아스트로파지라고 불리는 미지의 우주 미생물로 인해 태양이 점차 죽어가고 있었다. 지구의 종말이 머지않은 상황.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추진하고 있는 스트라트(산드라 휠러)가 평범한 중학교 교사로 살아가던 분자생물학자 그레이스를 찾아와 아스트로파지의 정체를 파악해 줄 것을 요청한다.
기억을 더듬더듬 찾아가던 그레이스는 아스트로파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행성 타우세티에서 지구를 구할 방법을 찾는 것이 자신이 임무였음을 기억해 낸다. 하지만 그때 그레이스 앞에 자신처럼 고향 행성을 구하러 온 외계 생명체 ‘로키’를 조우한다. 각자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가진 그레이스와 로키는 짧고도 긴 여정을 시작한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봐왔던 지구를 지키기 위한 영웅담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주 영화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과거의 <아마겟돈>이나 비교적 최근의 <인터스텔라> 같은 작품들의 비장함과 묵직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주인공 그레이스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희생되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인류를 지킬 희망의 끈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에도 인류를 위해 희생하기보단 그저 자신의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며 도망치죠. 영화의 톤이 너무 무겁지 않게 진행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이러한 회피형 주인공이기에 관객들로 하여금 더욱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가 처한 상황이라면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사회가 보다 복잡해지고 나의 책임이 더욱 커져만 가는 이 세상에서, 그레이스가 보여줬던 반골 기질과 현실적인 반응이 관객들에게 묘한 해방감을 주고 ‘나라도 그랬을 거야’라는 공감을 이끌어내며 결핍 있는 주인공에게 마음을 열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레이스는 온전치 않은 기억을 되짚어가며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고 차근차근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계인 ‘로키’를 만나게 되죠. 이 작품의 인기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귀여운 외형과 성격의 외계인 로키는 그레이스처럼 자신의 행성을 아스트로파지의 악영향으로부터 지키려고 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언어를 알아가며 소통하게 되는 과정 역시 꽤나 유쾌하게 풀어내었습니다. 이런 포인트를 통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무거운 서사에서 우주를 초월한 사랑에 대해서 보여준 <인터스텔라>, 사용하는 언어가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이를 통해 미래를 알게 된 주인공이 내리는 선택을 보여준 <컨택트> 같은 영화들과는 장르적 다른 궤를 달리겠다는 포부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레이스와 로키. 두 우주 생명체는 각자 자신의 행성을 지키겠다는 목표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곤 합심하여 타우세티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차원적인 물리 법칙이나 하드 SF물 특유의 기술적 구현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과학적 지식과 이론이 영화에 잘 녹아들어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위기를 주는 우주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이스와 로키에게 닥치는 역경과 그 해결방법 역시 비교적 단순합니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우주적 난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관계성과 성장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우주에서의 현재 사건과 지구에서의 과거 사건을 교차하며 보여주며, 그레이스가 잊었던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지구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는 사실에 도망치지만 결국 강제로 동면에 들고 우주로 쏘아 올려졌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강제로 이 우주에 던져졌고, 심지어 임무를 성공해 낸다 해도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상황 앞에서 그레이스는 도망치던 모습 대신 임무를 성공하기 위해 타우세티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로키와의 유쾌한 연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레이스는 분자생물학계에서 비주류 주장을 고집하다가 외면받은 과학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큰 저항을 하지 않고 중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인간관계를 크게 맺지 않고 묵묵히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을 겁니다. 로키에게 자신은 지구로 돌아갈 연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로키가 자신이 그 연료를 줄 수 있다며 지구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처음으로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영화는 그레이스의 성장담이자 두 생명체의 우정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와 로키, 두 생명체는 서로를 만나 고독한 우주에서 임무를 수행할 힘을 얻었고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임무를 할 수 없다며 도망치던 그레이스는, 이제는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로키를 구하기 위해 항로를 돌리기까지 했습니다. 로키 역시 스스로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친구를 잃을 수 없다며 의식을 잃은 그레이스를 구하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우주처럼 냉혹한 현실 세계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립된 우주선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책임감에 짓눌리기도 하죠. 그런 우리 앞에, 로키처럼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줄 존재가 나타나길 꿈꿔봅니다. 그 만남이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줄 거라 믿으면서요.
오래오래 생각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