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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단비 Feb 27. 2024

14. 옳은 것, 바람직한 것, 해야 할 것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대학교 입학 후 처음 듣는 수업이었다. 교수님은 아직 고등학생 티를 못 벗은 우리에게 빈 A4 용지 한 장씩 나눠주면서, 우리를 더 잘 알고 싶다며 A4 용지에 채워야 할 것들을 불러주셨다. 이름, 나이, 태어난 곳, 취미… 마지막 항목은 가치관이었다.


가치관? 고등학교 윤리 수업 시간에도, 그리고 철학 책에서도 많이 접한 단어이긴 하나 내 가치관을 쓰려니 막막했다. 수능 이후 처음으로 가져본 스마트폰으로 교수님 몰래 ‘가치관'을 검색했다.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그 속의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평가의 근본적 태도나 관점. 즉, 가치관이란 쉽게 말하여 옳은 것, 바람직한 것, 해야 할 것 또는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을 말한다.


정의를 꼼꼼하게 읽어봤으나 전혀 쉬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내 가치관이 뭐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날 만큼 대충 써서 제출하고는 집에 와서 한참을 고민했다. 앞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관은 무엇인가? 이것이 의도였다면 교수님은 성공하신 것이다.


그 즈음 고민 끝에 정한 가치관은 첫 번째가 인정, 두 번째가 재미, 세 번째가 관계였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보다 여태까지 나를 움직이게 한 동력을 정리한 것에 가까웠다. 인정 받는 것이 좋았고, 재미 없는 건 하고 싶지 않았고, 그 두 가지가 충족 되지 않으면 관계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가치관들은 꽤 길게, 사회인이 되어서도 선택들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컨설턴트라는 직업은 첫 번째로 중요한 인정과 두 번째로 중요한 재미를 충족시키기에 최적의 직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에 소홀해져야 할지라도 문제되지 않았다.


이 가치관들이 과연 옳은가를 재고하게 된 것은 A4 용지를 채워나간 그 날 이후 10년도 더 지났을 때다.

일을 할 때 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재미 있었다. 노력하는 만큼 즉각적인 인정이 돌아왔고, 그 인정이 좋아서 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인정과 재미에는 심한 경쟁이 수반되었고, 더 잘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할 수록 나는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가족과의 시간을, 일상의 여유를, 충분한 수면을 포기했다.


이유 없이 쓰러지는 날이 잦아지고, 한 번 아프기 시작하면 약을 먹어도 한 달 동안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병원에서는 그저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다.


엄마는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는 책임감에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고, 남자친구는 내게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발 너의 건강에 좀 더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은가?’에서 시작한 질문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큰 비약 같지만 일이 내 삶의 9할을 차지했기 때문에, 일의 지속성에 대한 의심이 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랫 동안 고민했고,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수십 장 짜리의 일기를 썼다.


사는 게 뭘까? 나는 그저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었다.

일은 왜 하는 걸까? 일이 그저 돈벌이 수단이 아닌, 나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바랬다.

일에서 오는 행복이라는 것은 허상인가? 그럴 리가 없다. 일을 하면서 분명히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일하며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 맞는가? 확신할 수 없다. 누군가 행복은 상황적인 것이라 지속적이고 재미는 순간적인 것이라 찰나라고 했는데, 내가 행복했다고 느꼈던 것들은 찰나의 재미에 더 가까웠다.


자문자답하듯 일기를 써내려가다 큰 모순이 있음을 발견했다. 나의 가치관은 행복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기 위해 설정된 것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가치관의 순서를 매길 때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살, 열정이 가득했고, 치열하게 부딪히고 성취할 수록 행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치관의 재설정이 필요한 때라고 느꼈다. 치열한 삶을 앞세워 내가 아끼는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까지 고통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과, 연인과, 그리고 친구들과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여유를 가지고 좋아하는 서핑, 독서,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 충분히 자고 싶었으며 무엇보다 아프고 싶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 답은 정했으나 확신을 얻기 위해 오랜 친구 J를 찾아갔다. 인생에 큰 고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답을 내어주는 친구였다.

“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관 세 가지가 뭐야?”

“갑자기 그건 왜?”

“중요한 일이야. 원래 나한테 중요한 가치관 세 가지가 있었는데, 이제부터 그 순서를 바꿔보려고 하거든. 근데 이래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 때 내가 적어 내려간 세 가지는 건강, 관계, 그리고 인정이었다. 

치열하게 사느라 잃어버릴 뻔 했던 것들을 1, 2순위로 올렸다. 그러면서도 의심했다. 내가 재미 없이 살 수 있을까? 이 가치관 대로라면 치열하기 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텐데, 그것이 나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을까?


꽤 오래 고민할 것이라 생각했던 J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막힘 없이 말했다.

“일단 건강해야 돼. 안 그러면 만사가 의미 없거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안 그러면 혼자 잘 돼봤자 의미가 없어. 그 다음에는 인정을 받아야 돼. 인정을 받지 않으면 건강과 사람이 있어도 재미가 없어.”


나의 새로운 가치관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과 J는 벌써 중요시하고 있었던 것을 나는 10년 동안 등한시하고 있었던 것에서 오는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 왔다. 그 날부터 앞으로의 모든 결정에 건강, 관계, 인정 세 가지의 가치관을 기준점으로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하루 아침에 바뀌기 어렵더라도, 억지로라도 건강과 관계와 인정 순서대로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기로.


그 세 가지의 가치관이 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기 시작한 순간, 일 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건강과 관계와 인정을 위한 것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0대를 바친 컨설팅 이야기

단비

hidamb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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