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잤다. 머리를 감으며 빠르게 계산해본다. 씻고 옷입고 준비하고 나가는데 10분,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뛰다시피 가면 10분. 20분 뒤 지하철을 타야 지각은 면한다.
아이들이 아직 자고 있는 집에서 최대한 조용히, 그러나 우당탕탕 준비를 하고 덜 말려진 머리를 손질하며, 구두를 구겨신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지하에서부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유난히 느린 거 같다.
손목시계는 무심하고 규칙적으로 남은 시간을 알려준다. 8분 이내에 지하철을 타야 한다. 그 녀석을 놓치면 5분을 기다려야 하고, 그럼 지각이다. 숨이 급해지고 마스크낀 안경잡이의 안경엔 김이 뿌옇다. 닦을 틈이 없다. 걷거나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거리 신호등의 파란신호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여유있는 아침이었다면 다음 신호를 기다렸겠지만, 일단 뛴다. 아 발이 편한 로퍼를 신을걸, 바지는 좀 더 헐렁한 바지를 입었어야 했어..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즈음, 숨도 턱에 차오르고 지하철역이다.
에스컬레이터를 근두운을 탄 것처럼 뛰어내려 지하철 개찰구에 도착하니, "지금 지하철이 도착하고 있습니다"라고 친절히 안내해준다. 휴 안도감이 몰려오며 뛰던 걸음을 멈추고 20여개의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고마운 지하철이 그제서야 플랫폼에 진입한다.
지하철 안전문에 비춘 내 모습을 그제서야 본다. 헝클어진 머리, 안경에 하얗게 서린 김, 초점없는 눈동자. 목 뒤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날이 추워져 이번 주에 입기 시작한 코트 속에, 다행히 어제 손수건을 넣어두었다.
춥다고 다들 꽁꽁 싸매고 타는 지하철에 헐레벌떡 땀을 닦고 지하철을 타는 아저씨의 모습이란... 다행히 사람들은 모두 스마트폰의 어떤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나 혼자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모습을 보고 피식 웃고 만다. 그래도 달리길 잘했어. 나 아직 안 죽었구만. 왕년에 백미터가 12초였으니~ 스스로 대견해한다.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가면 또 그저 그런 구성원이 되겠지만, 찰나의 지하철에서 그 순간만큼은 뭔가 해냈다는 기쁨을 느낀다.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지만, 왠지 기분좋은 성취감이 있는 하루일 거 같다.
아들 녀석과 얼마전 청계산 등산을 갔다. 매번 나의 배낭에 먹을 거, 마실 거를 넣어 다니다 이번에는 아이에게 배낭을 주며 "니 꺼는 니가 가져가 보는 게 어떠니?"라고 제안했다. 싫은 내색없는 아이가 왠지 대견했다.서로 배낭에 짐을 나눠지고 출발했지만, 많은 계단과 오르막에 아이는 금방 지쳐 보였다.
"짐 들어줄까?" 라는 달콤한 나의 유혹에 "아니요. 이번에는 제 짐을 제가 가지고 정상에 가보고 싶어요."란다. 언제 이렇게 컸지 라는 생경한 느낌도 들고, 머 이 정도는 버틸만 하겠지 라는 안도감도 같이 들었다. 아이의 가방이 가벼워지라는 아빠의 배려인지 모르는지, 왜 자꾸 자기 가방의 간식만 먼저 먹냐 보채는 아들에게 물도, 간식도, 과일도 잔뜩 먹인다. 다리가 아프고 그래서 쉬고 싶다는 녀석을 "이제 거의 다 왔어. 저기 언덕만 넘어가면 돼" 라고 달래고 어르며 정상을 함께 했다. 발 아래 서울을 같이 내려다 보며 물었다. "어땠어?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일단 출발은 했고, 정상에 가야 컵라면 먹을 수 있으니 참고 왔어요." 라는 아이의 답변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돌아서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이었다.
아빠도, 그리고 너도 앞으로 많은 길을 걷고 살아가며,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은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텐데 그래도 명심하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가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인 진짜 꿀맛인 것을 !! 포기하지 않으면 어찌 됐든 길이 열린다는 것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