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산이 더 맛있는 이유
나이를 먹다 보니 점점 편한 것만 찾게 된다. 익숙한 게 더 편하고 마음에 끌린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 가 귀찮아진다. 에너지 레벨이 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아직 배는 나오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늙는다는 게 쳐지는 뱃살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변화가 달갑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정말로 쳐지고 늘어지는 건 피부의 탄력이 아니라 정신의 탄력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재가 되고, 나이가 더 들면 내가 가장 극혐 하던 꼰대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들었다.
나는 유튜브도 보던 것만 본다. 새롭고 재밌는 걸 보고는 싶은데 찾아 나설 기력이 없다. 알고리즘은 정해진 바운더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켜도 사실 구미가 땅기는 게 별로 없다. 요즘은 밥을 먹으며 볼 만한 예능이 없다는 게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이다. 나이 먹고 한다는 고민이 겨우 그런 거라니. 무한도전 하이라이트도, 넷플릭스도 내 감흥을 끌지 못한다. 최근에는 ott 서비스도 다 끊었다. 오늘도 보던 걸 또 보다가 잠이 든다. 인생에 재밌는 게 별로 없다.
다른 이들도 별 다를 바 없나 보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오, 나도 그런데." 쓸데없는 포인트에 공감해보지만, 그런다고 삶이 즐거워질 리 없다. 취미를 만드자니 돈이 들고, 사람 만나는 건 귀찮고, 돈이 안 드는 취미는 재미가 없을 거 같고. 변명을 늘어놓자면 할 말은 많다. 30대가 되면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자기가 하고 싶은 취미를 마음껏 하고 살 줄 알았는데. 그래서 사는 게 재미지다는 소릴 들었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주말엔 이불에 파묻혀서 유튜브 보는 게 유일한 낙인데.
2022년에 UN에서 발행한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순위가 59위라고 한다. 10위 권의 경제 대국이자 선진국인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행복하지 않다니. 사실 남들도 나처럼 유튜브나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닐까. 그들도 밥 먹을 때 볼 게 없는 걸 고민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뻔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다 소멸했다.
일본 규슈 지역에는 오마미오오시마라는 큰 섬이 있다. 오마미오오시마에는 참치 양식장이 있는데, 여럿 빨판상어들이 양식장 밑에서 사는 것이 확인되었다. 빨판상어는 그 밑에서 참치가 먹고 남은 찌꺼기를 주워 먹으며 대부분을 누워 지낸다고 한다. 먹을 게 알아서 떨어지기 때문에 빨판상어는 먹이 활동을 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자연 상태의 빨판상어는 대형 어류를 따라다니면서 비굴하게 먹다 남은 찌꺼기를 주워 먹어야 하지만, 오마미오오시마에 사는 빨판상어는 바닥에 누워 입만 벌리고 있으면 된다. 알아서 먹이가 떨어지는 노다지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인터넷 짤에서 본 누워있는 바다상어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쪘고 행복해 보였다. 사람이고 물고기고 돈 많은 백수가 최고인 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빨판상어처럼 뻘밭에 침잠한 채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생을 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참치 양식장 밑에서 태어나는 행운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여서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 밥을 벌어먹고살 수 있다. 물고기로 치자면 나는 자연산이다. 먹이를 찾아 쉬지 않고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바다를 헤엄쳐야 한다. 하루하루 살아남는데 집중해야 하고, 겨울이 오면 지방을 두둑이 붙여 다가올 추위에 대비해야 한다. 계속 새로운 걸 배우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자연산이 맛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수산물 시장을 앞에 두고 사는 관계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연산 회의 식감과 감칠맛은 양식이 따라올 수가 없다. 검붉은 심해에서 삶과 죽음이 뒤엉켜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사는 자연산의 육신에 그 치열함이 새겨졌을 것이고, 우리의 혓바닥에 있는 미각세포도 그 치열함의 맛을 알아채는 것이리라. 그래서 자연산이 더 비싸고 맛있는 거라고, 나는 자연산이 비싼 이유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도 예외는 아니다. 인류는 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 투쟁해 왔다. 인류가 사냥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야생 동물의 강인한 육체와 근력을 잃어버린 대신에 근지구력과 체력, 인내심을 타고났다. 느리더라도 끝까지 사냥감을 추적하기 위해 털이 없어지고 땀샘이 생겨났다. 꾸준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능력은 인류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다. 그 대신에 조상들의 삶은 아주 피곤하고 고단했다고 한다.
'슬로우 스타터'였던 조상들 덕분에 우리는 온몸으로 문명의 편안함을 누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냥감을 추적하고 뛰어다니며 낯선 환경에 마주칠 일이 없어졌고, 몸으로 부대껴가며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을 쌓을 필요도 없어졌다. 이제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이기만 해도 아무 대가 없이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다.
이제는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머리를 쓰는 지식 노동자다. 그러다 보니 정보의 질보단 양을 중요시한다. 지식의 소비 형태가 깊이에서 속도로 바뀐 탓이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원하는 정보를 얻느냐'이다. 경제 논리에 따라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최대한 빨리 찾아내는 구글링 실력이 지적 능력을 판가름한다. 학교 수업과 리포트를 작성할 때 두꺼운 전공책을 읽고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검색 실력을 쌓는 편이 A+를 받는 데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게 된 것은. 인터넷망이 전국에 깔리기 이전만 해도 고급 지식을 얻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책이었다. 헌 책방에 들러 원하는 걸 얻기까지 책을 뒤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야 했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 수단은 현실 세계에서나 가능했다. 그땐 모든 게 느렸고, 느렸기에 깊을 수 있었다. 원하는 지식을 찾고 지식을 연결하기 위해 더 깊이 고민하고 사색해야 했다.
반면 디지털 세상에선 모든 게 빠르고, 편리하다. 정보를 찾기 위해 도서관을 들락거리고 힘겹게 얻은 지식을 소화하기 위해 애쓰던 시절은 지나갔다.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초록색 검색창은 모든 정보를 단 1초 만에 보여주지만 정보의 해상도는 더 흐려졌다.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 수 없다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처럼, 지식의 속도와 해상도는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쉽게 얻는 지식은 쉽게 빠져나간다. 우리가 쉽고 빠르게 정보를 얻는 대가로 지식의 깊이와 선명도를 잃는다. 생선으로 치자면 회의 깊은 감칠맛을 잊어버린 셈이다.
책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그 불편함에 있다. 지식을 얻고 이해하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불편한 대신에 우리는 생각하는 힘을 얻는다. 저자의 난해한 사유와 수많은 근거가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어려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독자도 비슷한 수준에 근접해야 한다. 어려운 책은 꼭꼭 씹어먹어야 소화할 수 있다. 느리고 불편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이해의 수준을 높여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저자와 동등한 눈높이가 되어가는 과정이 독서다.
독일의 뇌의학자인 만프레드 슈피처는 자신의 저서『디지털 치매』에서 디지털 기기가 어떻게 우리의 정신을 추락시키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학교에서 태블릿 pc를 사용해 편하게 모든 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교육 자료를 내려받고, 스마트폰으로 직장과 일상에서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고 SNS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로 손쉽게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기억력 장애와 주의력 결핍, 감수성 악화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디지털 치매』의 요지다. 슈피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디지털 치매에 시달리며 행복해지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중국 내에선 자국의 틱톡 사용시간을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인터넷 사용시간이 아시아 1위라는 통계와 59위의 행복도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든다.
헬스를 처음 시작하면 근육통을 겪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뇌 근육이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생각의 무게에 짓눌린 탓이다. 새로운 지식과 생각을 접하고 나면 타성으로 굳어진 뇌는 정신적 손상을 입는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머리가 지끈 지끈거리고 아프다. 뇌는 그 고통을 겪으면서 성장한다. 모든 헬창들이 숭배하는 제1원칙인 '점진적 과부하의 원리'는 학습과 독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독서를 통해 얻는 것은 '지적 성장'만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항상성을 갖고 있다. 항상성 덕분에 우리가 쾌락을 추구할수록 저울의 추는 반대로 기울어 고통이 뒤따른다. 마약, 게임, 도박 등 단기적이고 강한 쾌락의 축제가 끝나고 이내 불쾌함과 허무함이 뒤따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유익하지만 고통스러운 행동 이후에 찾아오는 행복감 역시 항상성이라는 저울추 때문이다. 운동, 조깅, 찬물 샤워 이후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뿌듯함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마라톤 선수들이 완주 후 느끼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헤로인 같은 마약을 투약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의 정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애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책을 독파하고 나면 이내 저울의 추가 기울어 우리는 행복해진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거나, 복잡한 개념을 이해했을 때 느끼는 기쁨도 쾌락과 고통의 역설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익숙하고 반복되는 것을 좋아하도록 동기화되어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공통점이 있는 사람과 사물, 개념을 더 좋아하고 익숙함을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낀다. 그 쾌감이 반복되면 중독이 된다. 그러면 이내 저울은 반대로 기울어 고통을 향함으로써 균형을 맞춘다. 사는 게 즐겁지 않은 이유,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 중 일부에 저울의 역설이 있다. 인스타, 유튜브, 틱톡, 구글 검색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를 지나치게 사용하다 보면 우리는 익숙함의 늪에 빠져 든다. 그 늪이 주는 편안함에 중독되다 보면 시소는 기울어 고통을 향해 있기 마련이다.
독서는 그 익숙함의 관성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행위다. 독서는 주어진 경험과 인식의 경계를 벗어나 새롭고 낯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신의 알을 깨트리는 과정은 원래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지적 자극이라는 기분 좋은 근육통이 스며들 것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책상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던 책을 펼쳐보길 바란다. 책을 읽다 잠들어도 좋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니까. 3대 500 치는 헬창들도 한때는 헬린이었다. 조금씩 책과 친해지다 보면 책이 주는 지적 불편함에 대해 찬양하는 당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