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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Apr 10. 2024

사람의 실력은 사람을 만나야 펼쳐진다.

평택고덕 숙식 노가다 이야기

어젯밤, 갑자기 평택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룸메이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봐도 반가운 동생. 처음 왔을 때 잘 챙겨줘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 일도 잘해서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준 녀셕.


갑자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단다.


형이 정말로 분위기 메이커였어요. 형이 가고 나서야 알았네요


그랬나. 추억해보면 항상 웃었던 기억이 많다. 물론 하루 대부분은 힘들고 덥고 춥고 습기로 가득하고 답답했지만 우리가 모여있을 때는 어느때 보다 즐거웠다.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사람으로 풀었다.

두 남자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두시간 가량 온갖 근황을 주고받았다. 가장 궁금했던 건 우리 팀원들. 어려운 상황에서 다행이 잘 버티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건 팀에서 고집세고 가끔 사고를 일으키는 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 동생이 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신기해요. 최근 그녀석이랑 새로 온 차장님이 같이 검사를 하는데 둘이 정말 잘 맞나봐요. 갑자기 공부를 하고 일을 배우려 하더라구요



놀라운 일이었다. 동시에 순간 ‘아, 나도 그랬는데!’ 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평택에 처음 왔을 때는 그야말로 어리버리였다. 룸메이트가 챙겨주긴 했어도 항상 팀장님에게 혼나기 일쑤였고 도면보는 것도 몰라 매일매일이 답답했다.


어느 날 새로온 검사원과 한 팀이 되었다. 그분도 이 일이 처음이라 조금 서툴렀다. 하지만 뭔가 잘 맞았다. 같이 도면을 보면서 ‘아 이거구나’ 해석하고 같이 알아가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순간 도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장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흐름이 보였다. 그분과 검사하나를 끝내고 난 뒤 팀에서 혼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또 한분을 만났다. 그분은 굉장히 유능하고 꼼꼼했다. (후에 삼성 엔지니어링으로 스카웃 되었다.) 대신 일용직인 나에게는 참 힘든 존재였다. 어느 때는 다들 퇴근할 시간 직전까지 일해서 다른 팀원들이 항의까지 하려 했었다. 일용직에게 시간 넘어 일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그분과 일을 하면 힘들고 피곤했지만 배울게 많았다. 저런것도 발견하는 구나 하며 감탄하는 일이 많았다. 같이 엘레베이터 지하 구덩이 속 모터 회사, 회선까지 확인하는게 재미 있었다. 덕분에 피곤해도 뭔가 성취감이 있었다. 이분과도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자 나중에 실력이 확 올라가 있었다.


사람의 실력은 사람을 만나야 펼쳐진다.


개인의 실력을 개인의 몫으로만 생각했다. 학생 때 스스로 공부한 양에 따라 성적이 정해지는 것처럼 실력은 개인의 노력으로만 정해지는 것으로 알았다. 나이를 먹고 여러 사람과 일해보니 다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의 실력은 달라지고 인생도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말이다.

내 노력이 아니라 그저 운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나를 인정해주고 나의 장점을 발견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실력이 꽃이 핀다.


반대로 은연중에 무시하고 내 실력을 인정해주지 않고 기회를 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저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심하면 그 사람과 있으면 지옥같기도 하다. 나는 둘 다 만나봤다.


이 모두가 직장, 공동체, 가족, 친구 중에 있을 수도 있다. 현장에서도 나와 상성이 잘 맞는 사람들과 일하며 실력이 오를 때도 있었지만 또 제한받고 나는 왜 이럴까 자기비하를 하게 되는 사람과 일할 때도 있었다. 같은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순간 팀원들이 떠올랐다. 거의 대부분 나와 미묘하게 상성이 잘 맞았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서울가던 날 나를 배웅해 주고 기차표까지 끊어주던 팀원도 생각났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나와 잘 맞는 사람들 덕분에 이곳에서 여러 수업을 해볼 수 있다. 아직은 작고 소박하지만 조금씩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만으로 행복한 일이다.


“벌써 10시반이야. 일용직 노동자면 빨리 자야지. 내가 호통쳤다.”


내일 선거일이라 쉽니다 하하.


얼마나 꿀맛같을까. 부디 이 대화 보다 꿀맛같은 내일 아침을 맞이하길 바라며 아쉬운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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