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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y 15. 2022

오브제와 데페이즈망

 임용 고시를 준비할 때 그나마 재미있게 했던 건 미술 각론(미술 관련 배경 지식)이었다. 수많은 검정 교과 내 수록된 다양한 작품들의 사조, 기법들을 외우는 건 그나마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공부였다. 시험 막바지에 달했을 땐 그림에 대한 정보를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됐는데 큐레이터가 된 거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우리 각자의 미술관'이라는 도서를 접한 뒤였다. 작품의 해설을 떠먹여 주는 다른 책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독자가 스스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준다는 점이다. 작가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작품 앞에서 그림과 대화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배운 건 써먹어야 내 것이 된다고, 당장 가까운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준비된 전시에 학습한 것을 연습하기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점 몇 개 찍어두고 그럴싸한 제목을 붙인 현대미술은 여전히 난해해서 오래 보기가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칸딘스키, 몬드리안 정도까지만 재미있게 보는 수준에 머물렀고 부산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제한적이었다.


 얼마 전 찾았던 '세계 차 전시회'를 끝으로 몇 달 동안 문화생활을 못 했으나 친구의 소개로 재밌는 전시를 발견했다. 작가 타나카 타츠야의 'MINIATURE LIFE IN BUSAN' 전은 신세계 백화점 센텀점 9층에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SNS에서 접했던 미니어처 작품들이 흥미로워 보여 토요일에 시간을 냈다. 소책자를 받아 들고 전시회장에 들어가니 미니어처도 미니어처지만 제목이 감탄스러웠다. 또 적절한 표현으로 말을 바꾼 번역가의 수고로움이 느껴져 값을 하는 전시라고 느꼈다. 사진 찍을만한 장소도 곳곳에 있어 한 번쯤 와볼 만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

 관람을 마치고 아쉬운 마음에 소책자를 펼쳐 작가의 말을 살펴보니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시점을 바꾸면 비로소 발견되는, 재미있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쏠쏠하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가 생활 용품이 미니어처 세상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모습이다. 웍질 하는 볶음밥이 파도가 되고 4등분 된 수박이 노아의 방주가 되는 등 기상천외한 활용이 기억에 남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유별나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뒤샹의 샘과 르네 마그리트가 떠올랐다. 오브제, 생활에 쓰이는 갖가지 물건들을 작품에 그대로 이용한 것. 데페이즈망,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물건이 있는 표현. 스테이플러 심이 건물로 표현될 때 그 사물이 그대로 사용됐으나 용도가 달라졌으니 오브제 같다가도, 스테이플러 안에 있어야 할 게 건물 행세를 하고 있으니 데페이즈망 같기도 했다. 둘 중 뭐가 맞는지, 다 맞는 건지, 정답이 있는 질문인지도 모르겠으나 홀로 왈가왈부하며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일론 머스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가상현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대."

 친구 한 명이 여간 유익한 영상들이 아닐 수 없다고 유튜브 채널을 추천하며 말했다. 들어보니 흥미롭고 다양한 주제를 과학적으로 잘 풀어낸 채널인 듯했다. 시간 날 때 종종 봐야겠다 생각했지만 그 채널에 푹 빠진 친구에게 괜스레 딴지를 걸고 싶었다.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는 난 가상현실에 살고 있다는 말을 흥미롭게 받아들인 친구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거 같다. 나도 내가 뱉었던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 우린 그렇게 인생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우주의 작은 먼지 같은 우리, 내면의 불안, 결혼관에 대해 친구들이 얘기하면 나는 내가 믿지도 않는 논리들로 반박했다.

 '나는 나로서 잘 존재하고 있는데 스스로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는 거 자체가 어색하고 불안한 일이지.'

 '우리를 스스로 한정 짖지 말자.'


 겸연쩍었던 건 일론 머스크 얘기를 한 친구가 영상에 달린 댓글이 너무 재치 있어 그 얘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였다. 설령 친구가 가상현실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나의 말이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을까. 오직 그 생각의 그름을 증명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든 나의 모습은 얼마나 추했을까. 하나님의 나라를 말이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나의 결심은 얼마나 가볍길래 이렇게 매번 날아가버리는 걸까.


 분명, 창작자는 오브제와 데페이즈망 같은 고민을 일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창작자의 의도를 추측해보겠다며 애쓰는 건 얼마만큼의 체력 소모인가. 오늘 나는 여러 번 주제넘었다. 작품을 즐기지 못하고 정답을 찾으려 했던 것도, 정답을 알고 있는 양 하늘에 계신 창작자 앞에서 젠체한 것도, 사람의 생각을 한 마디 말로 바꿔 보겠다며 도전장을 내민 것도 내 깜냥 밖의 일이다. 창작자는 물론 친구들이 보기에도 꼴사나웠을 거다. 적어도 내가 믿는 내용에 대해 얘기하거나 혹은 내 무지함을 인정하지만 그거 또한 정답은 아닐 거라고 얘기했다면 더 나았을까. 아니, 오늘은 그냥 침묵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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