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시작하는 여정

길 위의 스튜디오

by 길위의스튜디오

나의 첫 자유여행은 서른 살 유럽이었다.

자유여행은커녕 해외도 거의 가본 적 없던 내가 부모님의 환갑을 맞아 과감하게 3주짜리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슬로베니아부터 크로아티아, 스위스, 프랑스를 거치는 긴 여정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해외 자유여행 경험이 없었고, 심지어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유럽여행에 대한 막연한 로망만 있었다.

인터넷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 나와 똑똑한 딸들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 믿는 부모님이 용감하게 시도한 첫 여행이었다. 파워 J처럼 5-6개월 전부터 모든 교통과 숙박, 관광지를 예약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여행을 앞두고는 불쑥불쑥 불안함이 솟구쳤다.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과연 얘를 믿고 자유여행을 떠나도 되는 걸까, 싶었으나 준비하는 딸의 기를 꺾지 않으려고 걱정되는 마음을 감추고 마냥 설레는 척을 했다.


그렇게 떠난 첫 자유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계획대로 모든 여정을 소화했고, 엄마는 패키지와는 다른 자유여행의 매력에 푹 빠졌다. 물론 엄마의 여행은 자유여행이라기보다는 개인 가이드가 붙은 패키지에 가깝지만 그래도 단체버스에 실려 무작정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내는 여행은 엄청난 만족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정보를 찾아 여행 계획을 세우고 낯선 여행지를 내 발로 찾아 헤매는 성취감에 매료되었고, 그때부터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나는 게 취미가 되었다.

유럽의 골목을 걷고 있는 게 꿈만 같다던 부모님과

그러나 약간의 시간적 제약과 그보다 많은 금전적 제약을 제외하면 자유여행을 떠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는 나와 달리 엄마의 자유여행은 내가 함께할 때만 할 수 있는 제한된 기회였다.

정보 검색도, 온라인 결제도, 외국어도, 엄마의 자유여행에는 너무 많은 장벽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치트키인 딸은 매 여행마다 엄마와 동행할 만큼 효녀는 아니었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평한 기회는 아니다.



물리적, 심리적, 정보 접근성 등의 제약으로 인하여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관광취약계층이 세상에는 무척 많다.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가족 등등 누군가에게 여행은 남들과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13년을 근무한 학교를 퇴사하며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자유여행을 꾸리는 '길 위의 스튜디오'를 시작하게 된 것은 여행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그들이 얼마나 설레고 행복해하는지, 또 여행을 통해 얼마나 성장하는지 절실하게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감사하게도 달랑 사무실 한 칸 밖에 없는 공간에 예상보다 빠르게 참가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전에 함께 여행을 한 경험이 있거나 이미 학교를 졸업해 후배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친구들이었다.

이미 오사카와 홍콩 자유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졸업한 후에도 또 프로그램을 할 수 있다는 점에, 그동안 못했던 친구들은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는 점에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나 역시 덥석 믿고 찾아와 준 친구들과 부모님들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 들던 순간들이었다.


사실 대안학교에서의 13년은 나의 이력서에는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오래 근무했음, 으로 끝날뿐 직위나 연봉 협상 등에 실제로 반영해 주는 기관이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 없을 만큼 열정을 다해 일했기에 미련은 없지만 딱히 보람을 느끼게 해 준 마지막도 아니었기에 자칫 허무하게 느껴질 뻔한 시간이었는데, 새로운 시작에 선뜻 함께 해준 분들 덕분에 긴 세월을 헛되게 보낸 건 아니었구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오랜 세월 헌신해도 그 노고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가 애쓴 것 이상으로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기보다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래도 역시나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기쁘고 힘이 나는 일이다.


새 사무실이 도봉구 창동이라 서울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음에도 일산, 동탄, 죽전, 가평, 하남, 남양주, 수원 등 사방에서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이십여 명의 참가자들이 모였다.

직장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졌는데 다시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참가자, 대중교통 및 지역사회이용이 능숙하지 않아 보호자 주도로 모임을 가져왔는데 여행 공부를 통해 스스로 자조모임이 가능해지길 바라며 오는 참가자, 단짝친구나 연인과 여행을 꼭 가고 싶은데 자신들끼리 가기는 어려워 신청한 참가자 등 제각각 이유는 달랐지만 한결같이 '여행'과 '함께'라는 것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여행지어도 싫은 직장상사와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여행이 주로 부모님과 함께였다면, 청소년기, 성인기에 접어들어서는 대부분 '또래친구'에게로 욕구가 옮겨간다.


발달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친구에 대한 욕구가 높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달장애인은 학창 시절 등 성장 과정에서 또래친구와의 긍정적인 경험이 드물다. 교우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실패를 경험한 발달장애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누구보다 '친구와 함께'라는 것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우리는 '단짝투어'를 열었다.

일반적인 여행상품과 달리 '단짝투어'는 여행지의 선택부터 계획, 준비, 실행 등을 모두 스스로 하는 '배우고 떠나는 자유여행'이라는 점과 '내 친구와 함께'하는 소그룹 여행이라는 차별성을 갖는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내가 선택한 여행지를, 내 손으로 준비하고 내 발로 찾아 헤매는 '진짜 자유여행'. 그것이 우리 여행의 컨셉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꾸리던 여행과 달리 현재 참가자들은 대부분 근로를 하고 있는 직장인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 사전교육이나 여행일을 정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월급을 모아 여행을 떠나고 여가를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졸업여행보다 훨씬 실제적인 교육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된다.

사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돈이다.


발달장애인들은 경제관념이 부족한 편이다. 수 개념이 약하기도 하고, 자신의 소득으로 삶에 필수적인 소비를 하는 게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있는 대로 아낌없이 쓰거나 반대로 무조건 아껴서 인색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면 매번 예상비용을 계산하고 예산을 정하고 저축을 해 계획대로 소비하는 활동을 하지만만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학생들과 할 때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스스로 돈을 벌어 여행비용을 낼 수 있는 친구들이라면 보다 의미 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행을 기대하며 돈을 모으는 활동이 또한 쉽지 않은 직장생활을 더 잘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여행의 목적도, 교육의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같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고, 삶의 질을 높여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길 위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이루고 싶은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