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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May 20. 2024

우리들의 일그러진 여행

혼자서 튀르키예

반년을 기다리고,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써서 12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국내는 물론 태국, 체코,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두루 함께한 10년 지기 친구 송과 고심해서 고른 여행지가 튀르키예였다. 동서양의 문화가 섞여 볼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고, 지하도시를 탐방하거나 열기구를 타는 것처럼 다른 나라에서 쉽게 할 수 없는 액티비티가 있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여행은 코로나 이후 첫 여행이라는 것 외에도 우리에게 의미가 더욱 각별했는데

각자 직장에서 온갖 수난을 겪고 '개같이 버텨'서 한국을 뜨자고 모의했다는 점에서, 작년 한 해를 꼬박 쏟아부은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무사히 털었다는 점에서, 내가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넉 달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 여행은 쉴 틈 없이 달려온 우리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자, 두고두고 추억할 에피소드를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열흘 간의 휴가는 송이 인천공항에서 억류되는 것으로 화려하게 막을 올렸고,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경유지인 상해를 거쳐 혼자 이스탄불로 왔다.

 

송(졸린 라이언)은 여권 만료 기간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아 출국할 수 없었다....


송이 좋아하는 미술관이며 박물관을 돌고 나서 밤샐 때까지 수다를 떨고, 내가 신중하게 고른 맛집에서 정승 같이 호화롭게 식사하며, 에어비앤비에서 오순도순 신라면을 끓여 먹고 맥주를 마시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결혼 전 친구와의 마지막 여행을 깊고 진하게 보내고 싶었다.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나의 결혼으로 그녀가 느낄 허전함을 위로하고 싶었다. 송은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 중 한 명이고 스무 살 때부터는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으며, 고통과 환희의 순간을 포함해 내 영혼의 한 조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권 만료기간을 세세히 살필 만큼 세심하지 못했고, 세상은 그런 걸 하나하나 챙겨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계획이 어그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송은 출국할 없다는 알자마자 나에게 진정성 있게 사과하고는 빠르게 숙소와 투어 일정을 수습했고, 나는 괜찮다며 그녀를 다독이고는 장의 항공권을 얻어 씩씩하게 비행기를 탔다. 우리는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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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를 자르고, 치즈를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꿀을 뿌리면 치즈의 짠맛이 좀 덜해져서 좋다. 마트에서 산 카이막은 소문대로 맛이 좋았다. 큰 통을 사서 매일 아침마다 조금씩 나눠 먹었다. 

'스트리트푸드파이터'에서 백종원이 방문했던 카이막 가게에 가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카이막은 세 숟갈까지는 아주 맛있는데 그 이상 먹으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간절해지는 신기한 음식이다. 친구와 함께 왔다면 여러 메뉴를 시켜놓고 나눠먹었을테지만 혼자 가면 분명히 음식을 남기게 될 것이다. 예산도 신경 쓰였다. 동행이 있을 때는 공금을 모으니 소비한다는 의식이 없어 여행 때마다 돈을 펑펑 쓰고 다녔는데, 혼자 있으니 식당에 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마트표 카이막도 맛나다!


친구와의 추억여행이 결혼 전 혼자 여행이 됐다. 며칠이 지나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음식들을 보며 실감한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더니 내가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송과 여행하는 걸 좋아했나 싶다. 

특히 둘이 함께 있으면 고삐가 약간 풀려서 좋다. 혼자라면 절대 못했을 물색없는 짓들을 하며 깔깔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몰래 술을 마시고, 커다란 초코케이크 한 판을 사서 먹다 서로에게 미루고, 처음 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덥석 덥석 받아먹고 그와 어깨 동무하며 함께 셀카를 찍는 그런 일들.    


대학교에서 송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쟤랑 친해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분홍색 후드티, 현란한 돌청바지에 반은 단발, 반은 장발인 요상한 머리를 한 그녀가 꽤 독특해 보였으므로. 모르던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싫은 소리하는 법이 없는 송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함께 여행하며 나는 그녀가 친절하기 위해 정말로 애쓴다는 걸 알게 됐다. 송의 친절은 보상이나 대가를 원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상대가 인간이기 때문에 상냥하게 대할 뿐이다. (누구나 마땅히 친절하게 대접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너그럽게 무례를 용서하고, 어설픈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고, 돌발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송은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와 같이 있을 때 나는 좀 멋진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지구 반의 반 바퀴를 돌며 우리는 친해졌다. 


이제는 혼자다.

내가 나와 친해질 수 있을까?

까탈스러운 나를 용서하고, 어설픈 나를 참아주고, 돌발상황에도 침착할 수 있을까?

이번 여행에서는 나와 좀 친해져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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