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향기 나는 말이 좋았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해오름을 보며 출근했는데, 이제는 별을 보고 출근하는구나.
아침 여섯 시 삼십삼 분 KTX를 타고 이십여분을 기절하면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적응된 몸이 무섭도록 정확한 때에 눈을 뜨고 10분 정도 떨어진 버스정류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 '5분 뒤 도착 예정'이라는 버스 알림이 울린다. 5분의 여유가 생기면 그제야 날씨를 체감하곤 했다. 인사 한 마디 나눈 적이 없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길을 함께하는 익숙한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본의 아니게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오늘도 긴 코트를 입은 여자. 잠이 덜 깬 눈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면 항상 두 칸 앞에 서 있던 사람이다. 함께 4번 출구를 나가 버스정류장까지 걸음의 속도만 달리 한 채 동행한다. 겨울의 뉴욕 거리와 어울리는 사람이다. 익숙해진 모습으로 얕은 친숙감을 형성하는 인연은 언젠가 거리에서 스칠 때, 낯익은 사람으로 어렴풋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기억되기에 아무것도 아닌 인연은 없는 듯했다. 동대구역 광장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김을 ‘후!’ 하고 불었다. 크리스마스 맞이가 한창인 광장 안에 투정 어린 입김을 불어넣는다. 마스크에 가로막힌 투정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맴돌며 습기를 더 했다. ‘출근이나 하자’
긴 양말을 신었는데도 버스정류장 밑으로 찬바람이 불어 발목이 얼얼하게 아파 왔다.
'북구 3번' 버스를 타고 히터가 발목으로 오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발목이 반쯤 녹았을 때 회사와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하차를 했다. KTX 시간이 애매해서 출근 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르게 도착을 하기 때문에 주변을 걸으며 시간을 때웠다. 여름과 가을엔 선선한 온도를 만끽하며 풍경과 거리,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워 30분이란 시간이 소소한 행복처럼 느껴졌었는데, 추위에 취약한 나에게 겨울 아침의 30분은 곤욕일 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시간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겨울이 된 이후였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보내는 멍한 시간을 아까워하기 시작하고, 출근과 퇴근시간에 붕 뜬 30분이 서럽도록 아쉬웠다. 무엇을 하고 있지만 무엇도 남지 않은 텅 빈 나를 느끼며 염치없이 회사생활에 회의감이 들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달갑지 않을 만큼 허무했다. 그때마다 주말을 그리워한다. 단 이틀밖에 주어지지 않은 휴일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냈다. 글을 쓰고 목적 없는 걸음으로 거리를 걸으며 사진으로 담고 마음을 그렸다. 애꿎은 겨울을 탓한 것이 미안해졌다.
집 근처 5분 거리에 있는 24시 스터디 카페에서 팔천 원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열 시간을 사서 밤과 새벽을 홀로 반기는 주말이 이어졌다. 새벽 두 시쯤 되면 빈자리와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공간 안에서 진하게 느껴질 때 문뜩 주변을 돌아보면 그랬다. 공기가 피부를 스치는 것도 느껴질 만큼 고요한 순간이었다. 스터디 카페 맞은편 편의점에서 사 온 팩커피를 두 봉지째 컵에 붓고 있었다. 싱거운 아메리카노 세 잔을 마시고 나면 블라인드 틈으로 새벽 오름의 붉은빛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땐 시간이 아깝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과 비례하여 내가 채워졌고 밤새워 맞춘 퍼즐을 바라보듯 든든하고 뿌듯했다. 완성된 퍼즐을 다시 엎어 시간 속에 빠져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다섯 시간도 자지 못한 탓에 진해진 다크서클을 확인하고 해가 다 뜬 후에 침대로 몸을 던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해지는 순간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잠이 들었다. 밝은 밤을 즐기던 주말을 그리워하게 되는 이유였다.
'길을 잃었을 때,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모퉁이를 돌면 네가 찾던 세상이 짠하고 나타날 거야.'
별 보며 출근하고, 별 보며 퇴근하는 딸을 마중 나온 그가 한 말이었다. 6시 퇴근인 엄마는 KTX를 타고 출퇴근하는 나를 위해 이십 분가량의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해야 하지만 항상 딸을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는 시간이라며 빼앗지 말아 달라 말했었다. 그 날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투덜거리며 '나는 언제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라고 운을 띄웠었다. 때마침 빨간 신호가 왔고 타이어가 흰 선 위에 정차하자 내 손 위로 따뜻한 체온이 포개졌다. 29년을 누린 다정한 시선인데, 나는 익숙해지지 않은 채로 어린아이가 되어 소모된 용기를 채우려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아낌없이 온기를 나누며 내게 말했다.
'잃어버린 길 위에서 찾아 헤매는 발걸음도 결국엔 네가 닿으려는 곳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야. 아까워 말고 걷고 또 걷고 걸어도 돼'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멈춰있던 바퀴들이 도로 위에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짧은 찰나에 내 세계를 흔든 그의 말을 곱씹었다. 엄마에게 나는 그저 웃을 뿐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없을 만큼 내 속에서 많은 일렁임이 있었다. 뜨거워지는 속을 잠재우려 창문을 내렸다. 쌀쌀한 공기가 코끝을 시큰하게 만든다.
몇 분 전만 해도 살을 에이던 추위가 제법 마음에 드는 무게로 나를 감싼다고 생각했다. 차 안의 공기를 내어주고 창 밖의 공기를 받아들인 후에 창문을 올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미소를 머금은 영삼 씨에게 나는 보란 듯이 '사랑해!'라고 외쳤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 안의 화병에 꽃을 때마다 바꿨다. 매일 물을 갈아주어도 시간을 먹고 시드는 꽃잎이 선반 위에 흐드러질 때, 사진에 담았다. 꽃이 가장 열정적일 때 꽃잎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가장 뜨거운 순간이 선반 위에 쌓이고 바랜 꽃잎의 잔향이 서정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열정과 순정이 공존하는 작은 계절을 바라보며 내가 사랑하는 순간을 늘려가는 때는 그의 말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담기는 그의 말은 내 마음속 화병에 꽃과 같았다. 향기를 머금은 말이 공백을 채우려 햇빛이 스미는 것처럼 마음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습기를 증발시켰다.
다정한 침범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환기시켜주는 그녀의 모든 말을 사랑했다. 풍족해진 마음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생기가 돌았다. 오늘도 마음의 문을 열고 영삼 씨와 나눈 대화를 담아 본다. 마음 안에서 피고, 떨구고, 바래며 나의 세계에 계절이 된 문장에 잠시 머물러 있기로 했다.
'아까워 말고 걷고 또 걷고 걸어도 돼'